율곡의 생애와 효(孝)중시의 교육사상 연구(1) = A Study on the Thought of Yulgok`s Life and Hyo - Focusing on the Influence of Childhood and Boyhood -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7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01-117(17쪽)
제공처
율곡은 이원수(李元秀)와 평산 신씨 사이에서 1536년 12월 26일, 외갓집인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하였다. 신사임당의 태몽이 용이었기 때문에 아명을 현룡(現龍)이라고 지었다. 3살이 되면서 말과 글을 동시에 익혔다. 5세 때, 신사임당이 위독하여 속수무책이었는데, 남몰래 뒤뜰의 외할아버지 사당에 들어가서 엎드려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했던지 어머니 병이 완쾌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대기 효자`, `하늘이 낸효자`라고 하였다.
7세에 이미 한문의 문리가 텄고, 최초의 한문 문장으로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지었다. 가까운 이웃에 사는 진복창은 친척이었지만 정의롭지 않음을 경계하는 내용이었다. 8세에 파주로 이사와 살게 되었는데, 뒷산에 위치한 화석정에서 하늘을 보고 거닐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라 단 번에 오언율시를 지어냈다. 이른바 <화석정시(花石亭詩)>이다. 9세가 되면서 <이륜행실도>를 읽게 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 당나라 장공예가 `9세동거(九世同居)`했다는 구절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반드시 우리 가족도 그렇게 살겠다.”고 맹세하고는 <봉부모동거도(奉父母同居圖)>를 그렸다.
11세 되던 해에는 부친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이때도 뒤뜰의 외할아버지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아버지가 회복되었다. 신령이 나타나 부친 이원수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장차 조선의 대유학자가 될 테니 잘 길러야 하오. 내일 아침에 날이 새거든 이 아이의 이름을 왕자(王字) 변에 이자(耳字)를 넣어서 지으라.”고 하였다. 그대로 했더니 완쾌 되었으며, 이때부터 현룡의 이름은 이이(李珥)가 되었다.
13세 때에 반가운 첫 소식이 들려온다. 바로 진사초시에 장원급제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기쁜 일 다음에는 슬픈 일이 오게 마련이다. 16세 되던 해에 그렇게 율곡을 애지중지하고 사랑하고 가르쳐주시던 어머니요, 스승이었던 신사임당이 돌연 별세하였다. 율곡에게는 청천병력이요, 암흑시기가 온 것이다. 3년상을 정중히 모셨다. 상제례 역시 효성의 연장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섬기면 부모 섬기는 효도교육을 가정에서 교육으로 심어야 한다.
이러한 효정(孝情)교육이 곧 우리의 가정교육문화를 바로 하는 길이요, 사회를 밝게 하고 한 국가의 초석이 됨을 소년들에게 가르치자. 가장 한국적이며 세계적인 `사임당과 율곡의 효문화`를 세계화시키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이 일이야말로 다문화시대에 우리의 국격을 높이는 길도 됨을 인식시키려는 또 하나의 의도가 여기에 있다.
Yulgok(栗谷) was born between Lee, Won-Soo(李元秀) and Pyungsan(平山) Shinssi(申氏) on December 26, 1536, in Ojukhun(烏竹軒), Gangneung(江陵). The name of the child was Hyun-Ryong(見龍) because Taemong(胎夢) of Shin-Saimdang (申師任堂) was a dragon. At the age of three, he learned words and writing at the same time.
At the age of five, Shin-Saimdang was in critical condition. He went into the grandfather`s shrine in the backyard and prayed to God. His mother`s illness recovered when he prayed with utter diligence. So, people called `the hyoja(孝子) of swaddling(포 대기, poddaggi)` and `the hyoja of heaven`.
At the age of seven, the text of the Chinese text was already laid, and the first text of the Chinese <Jin, Bok-Chang story(陳復昌傳)> was written. Jin, Bok-Chang(陳復昌) living near the neighborhood was a relative, but was alert to the inimitability. He moved to Paju(坡州) at the age of 8, and He walked to see the sky in a Hwasukjung(花石亭) on the back mountain. It is a so-called "Hwa-suk-jung poet".
When he was nine years old, He read <Eryuhangsildo(二倫行實圖)>, and He was greatly impressed by the passage that Tang(唐) Dynasty, Chang, Gong-ye(張公藝) lived together for nine years. He swear, "My family will live like that, too." He painted the Bong-Boo-Mo-Dong-Geo-Do(奉父母同居圖).
At the age of eleven, his father`s illness was critical, and at that time he went to his grandfather`s shrine in the backyard and prayed for his father. His father was restored to be `intellectually gifted`. A spirit came up and said to his father, Lee, Won-Soo, "This child will be a great Confucian scholar of Korea in the future. If the day is early in the morning, put the name of this child in the prince`s side with an ear." After that, he was completely recovered, and from that time the name of Hyeon-Ryong became Lee, E(李 珥).
He pleased to hear the first news when he was 13 years old. It was the first time that senior passing was appointed as the first officer. But life is a sad thing after a joyful day. At the age of sixteen, the mother who was pessimistic, loving, and teaching Yulgok was suddenly dead. He honored the funeral. Funerals and sacrifices are also very important because they are an extension of the filial pie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globalize the most Korean and global culture of filial piety. Here is another intention to recognize that this is a way to increase our nationality in the multicultural era.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