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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승군(僧軍) 개념 - 국가권력의 승단 관리와 승도의 개념 및 범주의 관점에서 - = The Concept of Buddhist Monk Troops in the Period of Late Goryeo and Early Choseon - From a Perspective of the Official Control over Sangha and the Concept and Range of the Mo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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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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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327(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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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의 승군(僧軍)은 일반적으로 승려 신분의 군인, 또는 군무(軍務)를 맡은 승려로서 받아들여진다. 또 많은 이들이 승군에서 의병으로서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기록되는 승군은 왕실 원찰인 함경남도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 서쪽에 궁(宮)을 짓던 인력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개국 후 임진왜란 발발까지『실록』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승군은 영선(營繕), 제요(制窯), 제방(制防), 축릉(築陵)등에서 요역(徭役)을 담당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실록』과『고려사』의 많은 경우 승군은 승도(僧徒)라는 개념과 혼용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승군이라는 용어에 투영된 군사적 이미지에 대해 재고하고, 나아가 승군과 승도에 관한 개념적 혼효로부터 그 당시 승군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본 고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조선 초의 불교 승단은 변화의 시간을 겪고 있었다. 교단이 고려시대에 누렸던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은 상당 부분 제한되고,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그 준-관원적(準-官員的) 성격이 부각되어 기능적인 입장에서의 관리가 강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권력과 법제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서 승려의 개념 내지 승단의 범위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였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승려 개념 내지 승단 범위의 인식에 있어 승군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의 탐색과 규정은 유의미할 것으로 보이며, 한편으로는 이를 위하여 고려 말과 조선 개국 이후의 승군 개념의 연속성 여부에 대해서도 탐색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본고는 국가권력의 승단 관리와 승도 개념 변화의 관점에서 여말선초의 승군 개념을 재고해 보았다.
그 결과 본고는 전근대 시기, 적어도 여말선초의 ‘승군’에서 군사(軍士)적 이미지, 즉 군무(軍務)를 담당하는 병사(兵士)로서의 이미지를 거두어낼 것을 주장한다. 당시의 승군은 마치 공역군 즉 역군으로 사용된 병종과 같이 국가가 요구하는 비군사적 업무에 투입된―그러나 원칙적으로 교단에 소속되어 있던― 노동력이었으며, ‘군’이라는 이름과 달리 노역에 동원된 하급의 일반 승도와 차별적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승군은 노역에 동원된 승도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신역(身役)에 따라 민과 군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산 활동과 국가의 행정적 쓰임에 부응하던 세속의 일반 백성과 마찬가지로 교단 내에서도 하층에 위치하여 교단 안팎의 노역을 담당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국가가 요구하는 공적 노역에 종사했을 때 때로는 그저 승도로, 또 때로는 승군으로 불렸던 것이다.
나아가 승군은 승도라는 개념에 대한 중층적 이해의 지평을 열어준다. 즉 교단 내 승군의 출신성분이라 할 수 있는 수원승도 또는 유수승도에 주목함으로써, 교단 위계의 최하위에서 교단의 경제력을 담당한 계층에 대한 주목과 함께 승단의 범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수반될 수 있다. 승도라는 용어가 단순히 하급의 노동 인력 승려들 내지 승군을 배출하는 승단 내 하위 계층을 가리키며 좁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국의 승려 인구를 전 국민의 3할로까지 보았던 당시 지식인층의 진술과 더불어, 여말선초 승단의 계층 피라미드를 짐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도라는 용어는 이후로도 승단 내의 다양한 인원군을 지칭하며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만 여말선초 협의의 승도 개념 용례의 증가와 승군의 비군사적 성격으로부터 당대 승단의 지형을 폭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임을 다시 한 번 밝힌다.
Seung-gun (僧軍, Buddhist monks troops) of the traditional times is thought as the soldiers or the military troops composed with Buddhist monks that had duties of military affairs. Many people also consider Seung-gun as the army of Buddhist monks in the cause of justice in the wartime. By the way, Sillok (the Choseon dynasty annals) recorded the first Seung-gun as the monks who worked in the official construction site. And there are many other similar records of the monks working in the official construction site over time. Over more Sillok and Goryeosa (the Goyeo dynasty annals) used Seung-gun mixed with just Seung-do (僧徒, crowd of Buddhist monks). Therefore we need to reconsider the concept of Seung-gun.
In the Period of Early Choseon, the Buddist orders and Sangha (僧團) was being changed because their identity had been restricted by the new official/national power and they were imposed the role like a pseudo government official. In such circumstances the concept of Buddhist monk and the range of Sangha might be changed also together.
Conclusively we seems to be able to remove the image of the military affairs from Seung-gun. Seung-gun was a labor force from a standpoint of official/national power and the name was used as a just a monk or the crowd of Buddhist monks (僧徒) in many cases in the Period of Late Goryeo and Early Choseon. Furthermore the existence of Seung-gun shows us the broader and multilayer understanding over the range of Seung-do. The native status of Seung-gun was chiefly Su-won-seung-do (隨院僧徒, crowd of Buddhist monks obedient to a temple) of Goryeo and Yu-su-seung-do (遊手僧徒, crowd of Buddhist monks devoid of the official job) of Choseon. They were the lowest status in Sangha, and so we can see the crowd of Buddhist monks in the broaderand multilayer range. In other words we can understand the pyramid of Sangha in the Period of Late Goryeo and Early Choseon. The establishment of the pyramid was accelerate by the official system of Do-cheop (度牒, buddhist monk's certificate) that was a official/national project for the classification of the official monks approved by the national power (gong-do-seung, 公度僧) and the unofficial monks not approved by the national power (sa-do-seung, 私度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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