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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의 公山城 駐蹕과 후대의 記憶 = King Injo's Stop Over at Gongsan Fortress and Next Generation's Memory of it
저자
임선빈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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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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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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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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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79(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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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파천한 인조의 파천경위, 공산성 주필 상황, 이에 대한 후대의 기억과 평가에 대해 살핀 글이다. 인조의 공주파천은 이괄의 반란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매우 다급하게 결정되었다. 인조를 비롯한 왕실인사들과 조신들은 황망히 도성을 비우고 피난하였다. 조선왕조에서 국왕이 전란으로 도성을 비운 것은 선조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괄의 난이 진정되었다는 보고를 받기 전까지 피난길의 인조는 식사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국왕의 체통도 지킬 수 없었으며, 반란군이 패하기 전까지는 인조를 대하는 민중들의 반응도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인조가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이괄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은 후였으며, 공주 부근 유생들의 융숭한 환대도 받을 수 있었다. 인조가 대사간 장유의 주장에 의해 파천지로 선택한 공주산성은 금강이라는 큰 강이 북쪽으로 바로 앞에 놓여 있고 거리도 도성으로부터 멀지 않았기 때문에 급히 들어가 점거하고 있으면서 형세를 보아 진퇴하기 좋은 곳이었다. 공주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략적 요충지로 부각되어 새로 충청감영이 위치한 고을이다. 충청도관찰사 유근이 1603년에 공산성 안에 수축한 감영건물은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인해 공주로 파천하여 5박 6일간 주필할 때에 행재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공산성은 인조의 파천 1년 전 공주목사 송흥주에 의해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이 공산성 안에는 원래 ‘雙樹’가 있었고, 이곳에 감영 건물을 지으면서 이를 ‘雙樹營’이라 하였으며,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산성 안에 위치한 충청감영, 즉 쌍수영에 주필한 이후에는 공산성의 명칭도 주로 ‘雙樹山城’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조가 5박 6일간 체류한 공산성 안에서는 여러 가지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 인조는 신료들과 함께 공산성을 돌아보면서 산성의 형세와 기능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괄 등의 首級이 도착하자 도체찰사 이원익의 이름으로 露布를 만들어 인조에게 봉진한 다음 수급을 바치는 獻馘(헌괵)이 이루어졌다. 또한 갑자년 공주정시를 통해서 6명이 급제의 영광을 입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공주의 인물도 한명 포함되어 있다. 인조의 공주 파천으로 수고가 많았던 지방관에게는 포상의 은전으로 加資하고, 인조가 주필한 공주와 파천 경로 고을은 徭役을 3년간 감면하기도 했다. 인조의 공산성 駐蹕에 대해서는 후대인의 다양한 기억과 서로 다른 역사인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공주목사 송흥주는 인조의 공산성 주필 1년 후에 「山城駐蹕圖」를 올렸으며, 인조는 이 圖를 걸어두고 자신을 경계하겠다고 다짐하였으나, 현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오늘날 공산성 안에는 인조의 주필을 기념하는 「雙樹亭事蹟碑」가 서 있는데, 이는 사건이 발생한지 3세대 가까이 지나서야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겨우 세운 것이다. 처음 이괄의 난이 진압된 직후 충청도관찰사 이명준과 공주목사 송흥주는 우의정 신흠에게 「쌍수정기적비」의 수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실제 비문을 지은 인물은 신흠의 아들인 동양위 신익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도 관찰사(1668년) 민유중의 부탁으로 송시열이 지은 음기에는 인조의 처사를 강경하게 힐난하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이는 충청도 관찰사(1708년) 이선부의 부탁으로 쌍수정비의 글씨를 쓰고 추기를 찬한 남구만...
더보기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details of King Injo's flee from the royal palace, escaping Gwal Lee's Revolt, detailed situation of Gongsan Fortress stop over and staying, and memories and assessment of it by next generation.
The decision of King Injo's flee to Gongju from the royal palace was hurriedly made as Gwal Lee's rebel forces had moved south without any resistance. Many including King Injo, royal personage, and court officials evacuated the palace in a flurry and fled for safety. Even before the report that Gwal Lee's Revolt was suppressed was made, King Injo was hardly keeping dignity as a king and eating properly. What was even worse was that people's attitude on King Injo was sarcastic before rebel forces failed. However, by the time when King Injo arrived at Gongju, it was after receiving the report that Gwal Lee's military had been got splattered, allowing him to be hosted with warm welcome from Confucian scholars around Gongju area.
Agreeing with Yu Jang's claim, King Injo chose mountain fortress of Gongju as his flee from the royal palace as a long river, Geum River, was flowing north right in front of the mountain fortress and the location was not quite distant from capital, providing easy access to advance and retreat depending on rapidly changing circumstances. Inside the Gongsan fortress, there used to be a pair of trees (Sangsu: 雙樹) and the name of provincial office (Sangsu- yeong: 雙樹營) built there came from it. After King Injo's stop over at Sangsu-yeong, located inside of Gongsan Fortress, the name of Gongsan Fortress was called as the Mountain Fortress of a Pair of Trees (Sangsu- sanseong: 雙樹山城).
During the five days and six nights of the stop over, there had been a variety of ruling inside of the Gongsan Fortress. King Injo made a tour of Gongsan Fortress and looked into the situation and function of the Fortress. In addition, upon arriving of enemy troops' heads including Gwal Lee, a public announce was made by the name of Wonik Lee, a chief commander, leading to a ceremony of dedicating enemy troops' heads. Also, a state examination was enforced to appoint local talented as many as six including local talented form Chungcheong-do and Jeolla-do areas. Among them, there was one from Gongju, too. For those local officers who had been working hard, King Injo upgraded the degree of their official rank as a privilege and waived labor for three years for the people living in Gongju where he stopped over and stayed and also for the people living in the villages of his path of flee from the royal palace.
There have been a variety of memories about King Injo's stop over and staying (駐蹕) at Gongsan Fortress. Also, a different recognition of history has been made. First of all, one year later from King Injo's stop over and staying at Gongju, Heungju Song, a Gongju governor, dedicated ‘a picture of Fortress Stop Over and Staying (「山城駐蹕圖」)’ to King Injo, which he hung up on a wall to pledge himself to be on the alert. Today, there is a Monument of Sangsu-jeong (「雙樹亭事蹟碑」) inside of the Gongsan Fortress to commemorate King Injo's stop over and staying at Gongju. After much meandering, the monument was erected even three generations later from the event happened. At first, right after suppressing Lee, Gwal's Revolt, Myeongjun Lee, a Chungcheong province governor, and Heungju Song, a Gongju governor, requested editing ‘the monument of Sangsu-jeong’ to Heum Shin, the second vice-premier. However, this study found out that it was Ikseong Shin, Heum Shin's son, that created epitaph. Also, there was a criticism by Siyeol Song, asked by Yujung Min, at the backside of the epitaph which discussed King Injo's this treatment. The criticism caused Guman Nam frustrated who wrote the letters of the Monument of Sangsu-jeong and spoke highly of an additional writing of it. Eventually, Siyeol Song's criticism of 「a Monument of Sangsu-jeong」 ( ...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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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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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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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199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87 | 0.87 | 0.9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97 | 0.98 | 2.253 | 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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