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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東松 朴容羲의 정치단체 참여와 활동 = Park Yong-hee's Political Group Participation and Activities After Liberation
저자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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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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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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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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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32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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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ong-hee struggle Singanhoe movement, and the shrine, who led the organization and three Japanese occupation and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leader. This set the stage for him to become a political leader in domestic politics right after liberation. When he became liberated, he formed the Sahoeminjudang, which later merged with the Kookmindang to pursue a middle-of-the-road political stance. He organized the Kidoksinminhoe as a base of Christian moderate support.
After the announcement of the trusteeship plan, he staged a semi-revolution campaign with Ahn Jae-hong and others. He also played a major role in integrating with the Kookmindang, the Shinhan-minjokdang and the Hankook-dokribdang. He believed that trust rule could be a way to unify the Korean Peninsula. In 1947, the second Joint Soviet-American Commission resumed after the first Soviet-American Commission broke down. He clashed with a paternal father in the ruling party who opposed the committee's participation, and he was expelled from the party. He left the party with members of the National People's Party to form a new one. Since then, he has been the center of the center of the Democratic Revolution Party. When the May 10 general elections were enacted in 1948, he denied the communist regime and accepted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as a reality.
As a Christian minister, Park Yong-hee wanted to realize her Christian values through political activities. He saw the significance of the church when it tried to solve the plight of not only individuals but also of society, people and the nation. In this sense of problem, he pushed for a new national building campaign with the People's Party in the Middle and Middle East starting shortly after liberation. The meaning will grow as time goes by in that the government aims to consolidate and renew its life beyond the extremes of the left and the right, and it is hard to find a practical life in the modern history of Korea.
해방 후 박용희는 기독교 민족운동가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3ㆍ1운동과 신간회운동, 그리고 신사참배투쟁 조직을 이끈 지도자였다. 이것은 해방직후 그가 국내 정치현실에서 거물급 정치지도자로 자리 잡는 배경이 되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는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고, 이후 국민당과 통합하여 중도적 정치노선을 지향하였다. 그는 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모으기 위해 정당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독립촉성협의회에도 참여하였고, 해외 민족지도자들의 귀국을 계기로 ‘기독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기독교계 중도우파세력의 지원역할을 하였다.
신탁통치안 발표 이후, 그는 안재홍 등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우익정당통합차원에서 국민당과 신한민족당, 한국독립당과 통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추진되자, 그는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사항이 한반도 통일의 방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제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에도, 기독교계 조직 기반 확대에 나섰다.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속개되자 반탁운동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그는 미소공위 참여 문제로 임시정부계열과 충돌하였다. 그 이유로 그는 한독당의 제명 처분을 받았다. 그는 국민당계 인사들과 함께 한독당을 탈당하여 신한국민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중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주독립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8년 남한만의 5ㆍ10총선거가 구체화되자, 공산정권을 부정하며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현실로 인정하는 차선의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박용희는 기독교 목사 신분으로 정치활동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교회가 개인 뿐 아니라 사회와 민족과 국가의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그 존재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그는 해방직후부터 중간파 계열의 국민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건설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좌우의 극단을 넘어 끝임 없이 통합과 갱신을 지향하며 실천적인 삶을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시간이 갈수록 그 의미가 커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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