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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창<SUP>海窓</SUP> 송기식<SUP>宋基植</SUP>의 현실인식과 대응방략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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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20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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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75-10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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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식은 187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다가 1949년 세상을 떠난 유교개혁론자이며,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유교는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까닭에 한말까지도 사회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문호개방 이후 밀려든 서구 문명 앞에서 유림의 대응 방략은 무력하기만 하였고, 유교는 구시대의 유물로 인식되어 개혁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유교개혁론자들은 대부분 유교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이해하고 유교를 근본으로 삼고 서구 사상으로 그 단점을 보완하려 한 사람들이 많았다. 송기식 또한 그런 개혁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송기식은 처음부터 유교개혁론자는 아니었고, 초기에는 위정척사계열의 유학자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규탄하는 의병이 일어났을 때 19세의 나이로 의병장 김도화 아래서 서기로 종군하였다. 이후 김흥락과 사제의 인연을 맺고, 퇴계 학맥의 주류를 계승한 그는 평생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하나는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력을 상실하였던 유교를 부흥하는 일이었다.
송기식은 1895년 의병에 참가한 다음 1909년 이상룡이 대한협회안동지 회장이 되자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이 무렵 송기식은 이상룡과 긴밀한 협의 끝에 봉양서숙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게 된다. 그가 이렇듯 위정척사파에서 애국계몽운동가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서구 사상을 소개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시민사상이 담긴 책들을 섭렵하였고, 이상룡의 권유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동의 협동학교‧동화학교‧보문의숙‧봉양서숙 등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그 결과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안동 옥사에 투옥되었고, 이후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어 있다가 다시 경성 감옥으로 옮겨졌다. 1920년 영친왕의 가례를 맞아 석방된 그는 출옥한 이듬해 유교혁신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유교유신론』을 발간하였다. 1932년 송기식은 경성유교회 안순환으로부터 녹동서원 명교강습소 교수직으로 위촉받아 유교의 종교화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본고는 송기식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사상적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어떤 행동양식의 변화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Song Ki-sik was born in Andong, Gyeongsangbuk-do in 1878, lived under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passed away after liberation. He was an independence activist and educator. Since Confucianism was the dominant ideology of Joseon, it had a great influence on society as a whole. Nevertheless, in the face of Western civilization, which was pushed out after the opening of the door, Confucian Scholar countermeasures were helpless, and Confucianism was recognized as a relic of the old days and the object of reform. Many Confucian reformers tried to understand the positive aspects of Confucianism, make Confucianism the basis, and try to make up for the shortcomings with Western ideas. Song Ki-sik was one of those reformists.
Song Ki-sik was not a Confucian reformer from the beginning, but was a Conservative Confucian scholar. In 1895, at the age of 19, he joined the army under Kim Do-hwa. Since then, Kim Heung-Rak has a relationship with teacher and discipleship. Song Ki-shik, who succeeded the mainstream of Toegye, tried to solve two problems. One was to restore lost sovereignty, and the other was to revive Confucianism, which at that time lost power.
Song Ki-sik participated in Voluntary army in 1895, and then in 1909, when Lee Sang-ryong became the chairman of Andong branch the Korean Association, he started the Patriot Enlightenment Movement. Around this time, Song Ki-sik established Bongyang Seosuk after close consultation with Lee Sang-ryong and started his business in education. The reason for his transition from Conservative Confucian scholar to patriotic enlightenment activists was through books on democracy, liberalism and civil ideology that introduced Western ideas, and Lee Sang-ryong’s invitation played a big role. When he heard of the outbreak of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he led students of Hyupdong schools, Donghwa School, Bomun Uisuk, and Bongyang Seosuk. As a result, he was arrested at the scene and imprisoned in Andong"s prison, then moved to Daegu jail and then moved back to Gyeongsung jail. In 1920, he was released on the rite of King Young Chin. The following year, he wrote Confucianism Reformed Theory and summarized his thoughts on Confucian innovation.
In 1932, Song Ki-sik was appointed as a professor at Nokdongseowon Myeonggyo Campus by Ahn Sun-hwan from Kyungsung Confucian Church to participate in the Confucian religious movement. This thesis is a study on how the ideological transformation of Song Ki-sik led to the change of behavior and the change of behavior after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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