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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 각성의 생애와 사상 - 李景奭 撰 「華嚴寺 碧巖堂 覺性大師碑文」을 중심으로 = Byukam Gaksung’s Life and Ideology Focusing on the Epitaph of Grand Master Byukamdang Gaksung of Hwaum temple written by Kyungsu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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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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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examines the life and ideology of Byukam Gaksung (碧巖覺性, 1575~1660), a Seon Master and Buddhist instructor of Korea’s late Joseon dynasty. As a Buddhist monk, Byukam practiced under the tradition that promoted the unity of the meditative and doctrinal approaches. During a period that witnessed two wars—the Japanese (1592) and Chinese (1636) invasions—he engaged in an independent and active way of life. He participated in the wars, leading an army of monks, and engag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Namhan and Juksan fortresses. He was also instrumental in guarding the national archive in which were preserved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Byukam rebuilt many of the country’s Buddhist temples, and promoted the woodblock printing of Buddhist scriptures and the expression of Buddhist themes in painting. The range of his activities vividly illustrates his love for the nation and its people. In this way, he exemplified Buddhism’s determination, as an active religion, to protect the nation and its people, rather than its passivity, as a religion protected by the state.
In this way, Byukam modeled an engaged, active Buddhist practice that protected the nation rather than simply receiving the nation’s protection. Of course, not all of his activities prioritized loyalty to the king, and nor did he indiscriminately comply with the king’s orders. Rather, his actions were those of an engaged Buddhist who sacrificed himself for the safety of the nation. Thus, Byukam exemplified how a Buddhist philosopher should think and live in an era of war.
Gaksung declared his intentions to abandon or transcend precepts, meaning his intention to suspend his commitment to the religion’s precepts for the purpose of participating in the wars. In the aftermath of the wars, he rebuilt several Buddhist temples and fortresses, and developed his own philosophy. His activities asserted the presence of Buddhism in contemporary society and the presence of the Buddhist intellectual in the nation. Another noteworthy aspect of his achievements is his defiance of the religious oppression exercised by the government: at the time, the national religion was Confucianism, and Buddhism was suppressed.
During the later years of the Joseon dynasty, there were two major lineages in Buddhism: one was that of Cheongheo and the other was that of Boohyoo. Pyeonyang Ungi (鞭羊彦機) inherited Cheongheo’s lineage while Byukam Gaksung inherited Boohyoo’s. During Byukam’s age, Boohyoo’s lineage was composed of seven denominations, including one that was under Byukam’s charge. Byukam maintained harmonious relationships with the other six denominations, and developed his own denomination into a group of 700 monks composed of eight sects.
Although,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Buddhism adopted a stance that favored the unity of the meditative and doctrinal approaches, Cheongheo’s lineage was somewhat more focused on Seon practices, adopting a stance that promoted entry into Seon after relinquishing doctrine. However, Boohyoo’s lineage adopted the traditions of Linji, and Taego, in terms of dharma doctrine, but also embraced Bojo’s tradition, in terms of Seon philosophy. Byukam preserved this overlapping structure, which helped him to achieve greater balance in uniting the meditative and doctrinal approaches.
이 논문은 조선 후기 불교계의 대표적 선사이자 강사였던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의 생애와 사상을 살핀 것이다. 그는 청허(淸虛)와 부휴(浮休)의 선(禪) 중심의 선교(禪敎) 겸수(兼修)의 전통을 몸소 실천한 수행자였다. 벽암은 임란(壬亂)과 병란(丙亂)을 겪으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모습을 통하여 불교 지성인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벽암은 승군을 이끌고 전란에 참여하였고, 국가의 토목공사인 남한산성과 적상산성을 수축하였다. 또 그는 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수호하였고, 전국의 여러 불교 사찰을 중창하였으며, 불경판각과 불화 조성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삶은 모두 애민과 애족과 안민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타자화된 국가불교의 호법적 지향’과 달리 ‘주체화된 참여불교의 호국적 지향’을 보여주었다.
벽암은 불교 밖에서 국왕에 의해 실현되는 정법치국(正法治國)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호법(護法)과 달리 불교 안에서 불자에 의해 구현되는 실천불교를 주체적으로 움켜 안는 호국(護國)적 참여불교를 실현하였다. 그것은 ‘임금과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근왕’(勤王) 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고, 국왕의 명령에 의해 움직인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국왕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호법적 국가불교와 달리 불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호국적 참여불교였다. 그리하여 벽암은 전란의 시기에 불교 지성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실천적 불교 지성인의 모습으로서 보여주었다.
벽암은 ‘계를 버린다’는 ‘사계’(捨戒) 혹은 ‘계를 뛰어 넘는다’는 ‘월계’(越戒)를 선언하고임란과 병란에 참여하였으며, 사찰 중수와 산성 수축을 하였고,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통하여불자로서의 정체성과 인식틀을 확고히 세웠다. 벽암은 이와 같은 일련의 대내외적 활동을 통하여 불교계의 대사회적 존재감을 확립하였고, 불교사상가로서 실존적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주목되는 것은 유교를 정교(正敎) 또는 정학(正學)으로 숭상하는 숭유억불의 시대 아래서 자립불교와 자생불교를 모색하며 실천적 불교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불교계를 주도한 청허계의 편양 언기(鞭羊彦機)가 대를 이은 적전(嫡傳)이었다면, 부휴계는 벽암 각성(碧巖覺性)이 맏아들인 적전이었다. 벽암은 부휴계 7 대 문파의 수장으로서 나머지 6 대 문파와 함께 부휴계를 공고히 하였으며, 700 여명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벽암의 8대 문파는 청허계와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그리하여 부휴계는 청허계가 선(禪)을 주로 하고 교(敎)를 종으로 하는 사교입선(捨敎入 禪) 즉 선(禪) 중심의 선교(禪敎) 통합을 모색한 것과 달리 법통설에서는 청허계의 임제·태고법통설을 따르면서도 선사상에서는 보조선을 계승하는 중첩 구조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벽암 각성 또한 이러한 중첩 구조를 계승하면서 선과 교의 겸수(兼修) 혹은 겸용(兼容) 또는 병진(竝進)을 지향하면서 보다 유연한 불교인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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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 2013-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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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6-09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불교미술사학 -> 강좌미술사외국어명 : BULKYOMISULSAHAK -> The Art History Journal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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