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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覺國師 千熙의 生涯와 思想 = The Life and Thought of Jingak guksa Cheonhee
저자
최연식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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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67-90(24쪽)
KCI 피인용횟수
8
제공처
Cheonhee, Jingaku guksa(national preceptor), was thought to be the brother of Bae Jeon, a military official and court favorite of King Chunghye. But comparison between Cheonhee's epitaph and family register of Bae Sangji, the son of Bae Jeon, shows that they had no family relation at all. Cheonhee was born in a local official’s family in Heunghae. He began his priesthood at the age of 13 under the guidance of Master Ilbee, the dean of Banryong-sa socitey, the most influential community among Hwa’eom school at the time. Passing the monks’ examination with good grade at the age of 19 and he went through the head posts of a dozen of Hwa’eom temples including Bu’in-sa, Gaetae-sa and Geumsaeng-sa.
Though he belonged to the Hwa’eom school, he had much interest in the Ganhwaseon( Kanhua-chan) which had great influence on Korean monks since the end of 13th century. At the age of 58, he crossed the sea to Southern China to get the recognition of authentic Masters on his achievement in the Ganhwa-seon. His leave must have been planned and sponsored by his close colleague Shin Don who grasped the power just before Cheonhee’s departure to China. Cheonhee’s leave may also have had some relation with the diplomatic policy of Goryeo government which tried to make close but un-official relations with Zhang Shi-cheng regime in Southern China.
Having returned with the recognitions of contemporary famous Master Manfeng Shiyue and already deceased Master Mengshan Deyi after less than one year sojoun in China, he appeared as the central figure in the Buddhism. He was designated as the national preceptor in 1365 and led the Buddhist society until his powerful supporter Shin Don lost his power in 1371.
Resigning from the national preceptor, Cheonhee took the dean of Buseok-sa, the root of Hwa’eom school, and dedicated himself to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It might have been the effort to restore the tradition of the school. After then he moved to the Changseong-sa temple in Suwon, which might have been built as a base temple for his disciples, and died there in 1386. His stele was erected at the temple and owing to it the temple developed to a most influential one in the area.
In the aspect of Buddhist thought, Cheonhee had the faithful belief in Avalokitesvara and had a high regard of Ganhwa-seon. His Avalokitesvara belief was a succession of Uisang’s. His effort to reconstruct Buseok-sa temple was also to redeem Uisang’ s tradition. And despite of his belonging to the Hwa’eom school, Cheonhee actively practiced Ganhwa-seon. He also had close relations with many Seon monks; many Seon monks were found among his disciples and collaborators. His reception of Ganhwaseon can be understood as the reflection of Uisang’s tradition which regarded the practice more important than the pursuit of theories. Chonhee tried to preserve Uisang’ s tradition as well as receive newly introduced Ganhwa-seon; it can be estimated as one of the efforts to harmonize the Seon[Meditative practice] and Gyo[Doctrinal study] tried often in Goryeo Buddhism.
진각국사 천희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武臣으로 충혜왕대에 요직을 맡았던 裴佺의 형제라는견해도 있지만 塔碑와 관련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그는 경상도 興海 지역의 향리 집안 출신으로 파악된다. 그는 13세에 당시 화엄종의 주요 사찰이었던 高靈 盤龍社에서 社主 一非大師의 문하에 출가하였고, 19세에 僧科의 上上品에 합격하였다. 이후 여러 사찰의 주지를 맡으며 화엄종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는 화엄종 승려이지만 당시 불교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看話禪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8세 되던 1364년에는 본격적으로 看話禪師로서 인정받기 위하여 중국 강남지방에 유학하였다. 그의 중국 유학에는 같은 화엄종 출신으로 정권을 장악한 辛旽의 지원과 당시 강남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張士誠 세력과 교류하려는 고려 정부의 의도가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유학 1년 만에 이미 입적한 蒙山德異와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萬峯時蔚로부터 印可를 얻고 돌아온 뒤에는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등장하였다. 1365년 국사로 책봉된 뒤 1371년 신돈이 실각할 때까지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1371년 7월 신돈의 실각 이후 국사의 자리에서 물러난 천희는 고려 화엄종의 종찰인 浮石寺 주지를 맡아 사찰의 중창을 추진하였다. 화엄종 출신의 국사로서 화엄종의 전통을 회복하려한 시도로 생각된다. 부석사 중창을 마친 천희는 1386년에 수원 광교산의 彰聖寺에서 입적하였다. 이곳은 그의 입적 직전에 그와 문도들의 거점 사찰로 마련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입적 후 국사의 塔碑가 건립된 주요 사찰로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발전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천희는 관음신앙과 간화선을 중시하였다. 그의 관음신앙은 관음보살의 眞身을 친견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義相의 관음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며, 말년의 부석사 중창도 의상의 전통을 회복하려한 시도로 해석된다. 천희는 또한 교학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看話禪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다수의 선종 승려들과도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의 간화선 수용은 당시 유행하는 새로운 불교 사상에 대한 적극적 대응인 동시에 이론 탐구보다 실천 수행을 중시하는 의상계 화엄종의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의상계 화엄사상의 전통과 새롭게 전해진 간화선을 함께 아우르려한 그의 모습은 고려 불교계에서 발견되는 禪敎會通의 시도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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