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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에 대한 기억과 전승 -"절의(節義)"에 대한 현창(顯彰)과 배제(排除)를 중심으로- = The Memory of Joseon Captives during the Hideyoshi Invasions and the Legacy Thereof (1592~1598) -With a special focus on the exaltation and removal of honor (節義, jeolw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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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151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05-142(38쪽)
제공처
이 논문은 임난 피로인에 대한 조선의 절의 위계화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피로인을 바라보고 그 존재를 규정한 조선의 정치·사회적 시선은 어떠했으며 이러한 시선이 피로인 개개인에게 어떻게 내면화되었는지를 살펴본 글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발생한 피로인 문제는 전후 조선-일본관계의 복원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애물로 작용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조선인 포로의 쇄환문제는 조선과 일본 양국의 국교 회복과 관련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가 되었다. 조선은 피로인을 본국으로 쇄환하기 위해 1605년 惟政 외에도 1607년·1617년·1624년·1636년·1643년에 걸쳐 다섯 차례의 사절을 더 파견하였다. 그중에서도 1607년·1617년·1624년의 사절은 피로인 쇄환을 사명으로 하는 ``刷還使``라는 직책으로 파견되어 일본에 산재한 피로인을 쇄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公民을 확보하고 전쟁으로 손상된 체면을 회복하여 국가의 공적 기능을 복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쇄환책은, 순절자를 찬양하고 이를 서사화하여 절의를 표상화 하는 대민교화책에 의해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조선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절의의 관념을 확대 재생산하여 종래의 질서와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죽음``을 전제로 한 ``절의``, 즉 ``殉節``이 특히 강조되었고, 순절자들은 왜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절의의 열사로 추장되고 받들어졌다. 이렇듯 ``순절``을 애도하고 추모하며 국가적으로 현창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피로인들의 절의``는 배제되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離散된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인 피로인들은 사회가 ``절의``를 표상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차등적으로 위치 지어졌다. 이러한 방식은 순절자와 피로인의 절의를 위계화 하여 순절로 표상되는 절의에 가장 높은 권위와 위엄을 부여하였으며, 상대적으로 피로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조선에서 근 60여 년에 걸쳐 쇄환사·통신사를 통해 피로인 송환에 힘썼던 것과는 다르게 본국 귀환 후 피로인에 대한 사후 처리 과정이 빈약하였던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피로인들 스스로도 ``불굴의 죽음``과 ``비굴한 삶``, ``삶보다 가치 있는 죽음``과 ``죽음보다 못한 삶``의 극명한 대비를 내면화 하였다. 특히 사대부로서 포로가 되었던 이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희생과 고통이 그들의 ``毁節``까지 합리화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피로인들 내부에서도 끝내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쓴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목숨을 잃은 이들의 절의, 갖은 고생 끝에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여 귀환한 이들의 절의, 그리고 국가의 쇄환에 의해 뒤늦게 돌아온 이들의 절의는 동등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강항이나 정희득 같이 의리명분을 철저히 내면화했던 양반사대부일수록 ``절의``를 그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손상시킬 수 없는 지고한 가치이자 인간의 도리로 더욱 강조하고 내면화하였다. 조선사회가 전란의 순절자와 살아남은 피로인을 차별화하였던 시선, 더불어 포로 스스로 이러한 차별적 시선을 내면화하여 갖게 된 自責과 죄의식은 조선후기 내내 피로인에 대한 기억을 규정했다. 이로 인해 살아남은 포로들에게 고국 조선은 또 다른 ``異域``이 되었던 것이다.
더보기This study analyzes the political and social gaze through which those Joseon nationals who were taken captive by the Japanese armies during the Hideyoshi Invasions (1592-1598) were looked at and identified. It also analyzes how these gazes were internalized by individual captives. In the aftermath of the war, Joseon developed an edification policy which emphasized the notion of honor (節義, jeolwui) and the concept of ``death`` in defense of such honor (殉節, sunjeol). Joseon established a hierarchal structure under which those who died without ever surrendering to the Japanese invaders were regarded as having a greater honor than those who were taken captive but remained alive. The highest status and dignity was granted to those who died in defense of their honor. As such, the perception of those who were taken as captive but later returned alive as servile individuals became widespread within society. In the aftermath of the Japanese invasions, Joseon made efforts to repatriate the captives. To this end, it dispatched royal envoys to Japan on five different occasions during the period that spanned from 1607 to 1643. However, the government`s policy of glorifying those who died in defense of honor and lionizing their efforts ensured that those who returned home alive did so damaged. On the other hand, the captives internalized extremely contrasting notions such as those of ``indomitable death`` and ``servile life``, and ``death as more valuable than life`` and ``life as less valuable than death.`` In particular, the captives who belonged to the sadaebu class did not regard their sacrifice and pain as being justification for their forgoing of honor (毁節, hwejeol). The honor (節義, jeolwui) of those who did not want to assimilate in Japan and lost their life trying to escape, of those who successfully escaped and made their way back to Joseon, and that of those who returned to Joseon late in conjunction with the government`s repatriation policy were not perceived as being equal, and this even amongst the captives. Yangban such as Gang Hang and Jeong Huideuk, who had thoroughly internalized the notions of righteousness and justification, viewed honor (節義, jeolwui) as the supreme value and moral duty of man, and as something which should not be damaged under any circumstances. Joseon society`s discrimination between those who died in defense of honor and those who were taken captive, and the sense of self-condemnation and guilty conscience possessed by the captives that was created by their internalization of these discriminative gazes defined the memories of these captives during late Joseon. As such, the Joseon homeland became another strange land to these living cap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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