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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정제두의 현실 인식 = Hagok Jeong Je-du’s perception of reali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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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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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is a study on the perception of Jeong Je-du about the situation inside and outside in late Joseon Dynasty. Jeong Je-du perceived reality differently from the Seoin-Noron(西人-老論) that formed the mainstream of the time, which had been understood by the influence of Yangmingxue(陽明學). However, it is not clear whether his argument was influenced by Yangming studies in that it was not much different from Zhuzixue(朱子學) scholar’s argument. At the time, Joseon was confused by the change of Ming(明) and Qing(清n) externally and internally of Controversy over propriety, Political upheaval and Treason.
At that time, Joseon was given the Zhengshuo(正朔) of Qing. For that reason, Jeong Je-du said that the emperor of Qing should be recognized as a heavenly ruler. He also said that Joseon officials had become servants of Qing and bow down to the Qing emperor. This is a realistic perception of Jeong Je-du, was aware of the power of the Qing Dynasty who completely overpowered China, about the situation outside in late Joseon Dynasty.
Jeong Je-du did not offer direct evaluation or specific alternatives to political events within Joseon. However, his perception of reality in late Joseon Dynasty can be examined through the his theory of rituals and impartiality.
At the funeral of King Gyeongjong and Queen Danuibin, he insisted on his theory of rituals. The premise was that “Parents hold on the funeral of their firstborn son and the first daughter-in-law for one year.” This was his theory of rituals, based on the Gyongguk Daejeon (經國大典, Grand Code for Statecraft), was established through the 1659 controversy over propriety(己亥禮訟) and the 1674 controversy over propriety(甲寅禮訟).
After the revolt of 1728(戊申亂), he went to court to teach Zhuzi’s Gengzifengshi(庚子奉事) and Wushenfengshi(戊申封事). Through this lecture, he presented his theory of impartiality to King Yeongjo. He said that after the King Sukjong’s decision of 1716(丙申處分), party controversy arose, resulting in rebellion such as the revolt of 1728. And he said that in order to resolve such the dispute, the King Yeongjo had to execute the stern political harmony(峻論蕩平). The way is to have a very fair and unselfish heart, to judge right and wrong, to punish the guilty, and to hire the wise.
There may be criticism that his argument, in part, reveals his personal background tendency of the Seoin-Soron(西人-少論). However, he insisted on the timely institutions, emphasizing the reality of the time and insisted on the stern political harmony. Therefore, his argument can be said to be the result of impartial perceptions of reality that faced the internal and external circumstances of the late Joseon Dynasty.
본고는 鄭齊斗가 조선 후기 대내외적 현실을 바라본 시각에 대해서 연구한 것이다. 정제두는 당대 주류를 형성한 서인-노론계와 다르게 현실을 인식했는데, 이는 그동안 양명학의 영향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의 주장 근거가 주자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양명학의 영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명·청 교체와 내부적으로는 예송·환국·옥사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정제두는 조선이 청나라의 정삭을 받았기 때문에 청나라의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조선의 신하들은 배신이 되어 칭신하고 궤배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원을 완전히 제압한 청나라의 힘을 자각한 상황에서 내린 현실적인 대청인식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정제두는 조선 내부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가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의빈과 경종의 상에서 제시한 예론 및 무신란에서 제시한 탕평론을 통해 그의 당대 조선 정치 현실 인식에 대해서 검토해볼 수 있다. 그는 ‘장자와 장자부의 상에 부모는 기년복을 입는다’라는 대전제 위에 예론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을 거치며 時制로 정립된 『經國大典』을 근거로 한 복제설이었다.
정제두는 무신란 직후 조정에 올라와 朱熹의 경자봉사와 무신봉사를 통해 자신의 탕평론을 영조에게 제시하였다. 그는 병신처분 이후부터 당론이 심해져 무신란과 같은 화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왕 영조가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지니고 시비곡직을 분명히 가려서 죄진 사람은 벌주고 현자는 등용하는 준론 탕평을 시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예론과 탕평론은 부분적으로 서인-소론계라는 자신의 인적 배경 경향성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당대 현실을 중시해 시제에 입각한 예론〔時〕을 주장하였으며 원칙에 입각해 지극히 공평한 탕평론〔中〕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조선 후기 대내외적 상황을 직시해 내린 공평무사한 현실 인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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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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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5-04-26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미등록 -> The Korean Society of History of Historiography | KCI후보 |
2005-04-1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韓國史學史學報외국어명 : The Korean Journal of History of Historiography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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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47 | 0.47 | 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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