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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議府 특파원 李壽興의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 제2의 안중근을 꿈꾸며 = A Study on the Heroic Struggle and Raising War Funds of Lee, Soo-Heung who was a Domestic Correspondent of Cham-Eui-Bu based in Manchuria, :Aspiring to become the secondary An Joong Keun
저자
박환 (수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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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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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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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07(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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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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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oo-Heung was dispatched from China to Korea as a correspondent of Cham-Eui-Bu which was a group for an international independent movement based in Manchuria, China in the mid-1920s and raised war funds to develop the heroic struggle for people in Korea. Such heroic struggles were of great significance for Korean independent activists to Korea from Manchuria, China. Because Cham-Eui-Bu is an affiliated organization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sending him to Korea was a big part of the military activiti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Second, the deployment of the army in Korea for national independence based in Manchuria was mainly accomplished after the 3ㆍ1 national independent movement and the Manchurian Incident in 1931. However, Lee, Soo-Heung was being carefully analyzed for his efforts in Korea after the 6ㆍ10 Manse Movement in 1926. At that time, he wanted the attention of the world; there was an attempt to assassinate the Sweden’s Crown Prince visiting Korea and he wanted to highlight Japanese oppression in this regard.
Third, Lee, Soo-Heung’s movement areas for raising war funds were mainly Anseong, Yeoju, and Icheon, among others in Gyeonggi Province because he was staying in Icheon. We need do more research in the attempt to understand more about Park, Seung-Yook’s place in Anseong and Lee, Min-Eung living in Heungcheon-myeon. Park, Seung-Yook was known for making big donations to many schools in the Anseong area. He also had two sons including Park, Hyeong-Byeong who were also involv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Lee, Min-Heung was known as a representative for charity work in the Yeoju area.
Fourth, Lee, Soo-Heung received modern education, but his ideas were based on Confucianism. It seems that the staples of Confucianism and patriotism were ingrained by his father and a family friend Choi, Sang-Duck. Also, I think that the suicide of Choi, Sang-Duck in Manchuria, China who was Lee, Soo-Heung’s master and the death of his comrades at the Komaryeong disastrous accident made him even stronger patriotically and spiritually.
Finally, Lee, Soo-Heung was born in Icheon, Korea and then came to China as an exile. After he received military education in China, he was an activist for independence and was sent to Korea from the Korea provisional government in China in the middle of 1920s.
이수흥은 1920년대 중반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인 참의부의 특파원으로서 국내에 파견되어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금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만주지역에서 국내에 파견된 많은 독립운동가의 활동 사례를 알려주는 의의를 갖는다고 판단된다. 특히 참의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기관이므로 그의 파견은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더욱 주목된다.
둘째, 만주지역 독립군의 국내파견은 3ㆍ1운동 이후와 1931년 만주사변이후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수흥은 1926년 6ㆍ10만세운동이후에 이루어진 국내활동으로서 특별히 주목된다. 특히 그는 스웨덴 황태자의 국내 방문 시 그를 암살함으로써 세계의 주목을 끌고 일제의 탄압을 폭로하고자 하였다.
셋째, 이수흥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안성, 여주, 이천 등지가 바로 그곳이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그의 연고지가 이천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의거를 행한 대상인 안성의 박승육의 집, 흥천면의 이민응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박승육의 경우는 그 자신 안성지역의 대표적인 자산가로서 안성학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등 많은 기여를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자식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형병 등 두 아들이 있다. 이민응은 여주지역에서의 대표적인 자선사업가로 알려져 여주군사 등에 상당부분 그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수흥은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인물이기는 하나 그의 기저에는 유교적인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특히 부친으로부터 받은 유교적 사고와 충군 애국사상은 만주에서 만난 부친의 친구 채상덕에 의해 더욱 강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만주에서의 스승 채상덕의 자결과 고마령 참변에서의 동지들의 죽음은 그에게 더욱 강한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이수흥은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후 1920년대 중반 국내에 파견되어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겠다.
분석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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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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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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