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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과 경성의 불안한 공존: 식민지시대 서울의 도시 이미지 형성에 대한 연구 = The Unstable Coexistence of Hanseong and Gyeongseong: A Study of the Formation of the Urban Image of Seoul under Japanese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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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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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식민지시대 서울의 도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성(漢城)과 경성(京城)을 상징하는 장소들이 공존한 양상을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이는 한성에서 경성으로의 변화와 그 이미지의 형성을 이분법적인 분리보다는 복잡하게 얽힌 중첩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주목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한성과 단절된 듯한 도시로 여겨진 경성의 도시 이미지에서 한성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경성의 도시 이미지는 당대인들의 인식 및 반응과 시각문화를 활용한 일본의 정책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본고는 1897년에서 1939년까지의 시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경성의 도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성과 경성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당대인들이 한성에서 경성으로의 전환을 인식할 만한 시각적인 변화들이 나타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97년에서 1910년까지의 시기에 한성의 도시 공간에서 나타난 변화들은 한성의 저항과 경성의 태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성의 도시 공간에서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경운궁(慶運宮)을 중심으로 근대화사업이 시행되었으며 아울러 서양 공사관 영역과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이들 사이의 균형은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무너졌다. 한성은 경성으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남촌 전반으로 확장된 일본인 거류지 인근에서는 경성박람회(京城博覽會)가 열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인 남대문(南大門) 일대의 성벽은 해체되었으며 창경원(昌慶苑)은 동물원으로 격하되었다.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리게 된 경운궁에는 1910년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경성의 태동과 한성의 쇠락은 도시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났다.
1910년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경성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되어가던 과정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인 경성의 건설과 조선왕조의 왕도(王都)였던 한성에 대한 기억의 공존으로 논의될 수 있다. 경성으로 바뀐 도시 공간에서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은 점차 사라졌다. 이 공간은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들인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廳舍), 조선신궁(朝鮮神宮) 등으로 채워졌다. 경성의 건설은 다양한 행사와 매체를 통해 기념되었다. 당대의 조선인들은 새로운 시각 경험을 즐겼으나 동시에 조선인 지역인 북촌과 일본인 지역인 남촌을 구분 지으며 일본인들의 북부 진출을 우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 장소들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경성의 도시 이미지에는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다.
경성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경성(大京城)’으로 불렸다. 1926년에서 1939년에 이르기까지 대경성과 그 이미지는 소비문화의 정점에 있었으나 이는 허상에 가까웠다. 남촌의 중심인 조선은행 일대는 백화점과 함께 근대 도시 대경성의 핵심적인 이미지로 굳어졌다. 한성을 상징하는 장소들은 여가의 중심지인 공원으로 변용되었다. 그러나 대경성은 남촌과 북촌이라는 각각의 도시로 여겨질 정도로 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인들은 대경성의 도시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를 파편으로 보았다. 산책자(flaneur)도 그들 중 하나였다. 대경성의 거리를 부유하며 남촌과 북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들은 조각난 대경성이미지 그 자체였다. 이는 경성의 도시 이미지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종합으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경성의 도시 이미지 안에서 이렇게 한성과 경성은 불안하게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This paper attempt to explore the coexistence of Hanseong and Gyeongseong in the urban image of Seoul during the colonial period. It examines the transition from the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anseong to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and the formation of the image of the city. There are two main focuses in this study. Firstly, it is the fact that elements representing Hanseong are found in the image of Gyeongseong, which seems to be disconnected from Hanseong. Secondly, the image of Gyeongseong is located at the intersection of Japanese politics. The period from the founding of the Great Korean Empire (Great Han Empire) to the 1910 Korea-Japan annexation treaty witnessed the birth of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Modernization projects on the Gyeong’un Palace (Gyeong’ungung) were carried out. At that time, there were a Legation Quarter around the Gyeong’un Palace and a Japanese town near the Catholic Cathedral. The political balance among the Korean Empire, the Western superpowers, and Japan collapsed during the Russo-Japanese War. After this event, Hanseong began to be called Gyeongseong. The Gyeongseong Fair was held near the Japanese settlement that extended to the whole of Namchon (South Village). In contrast, the walls near Namdaemun (the Great Southern Gate), a place symbolizing Hanseong, were demolished. In the Gyeong’un Palace, which was called Deoksu Palace (Deoksugung), the construction of Seokjojeon (Stone Hall), a Western-style building, was completed. The emergence of Gyeongseong and the decline of Hanseong appeared together simultaneously in the formation of the modern city of Seoul.
During the period from 1910 to the mid-1920s, when Hanseong was replaced by Gyeongseong, the image of Seoul based on the construction of the colonial capital was created. During the time, Korean people attempted to remember the lost Hanseong. Their strong feelings of nostalgia for the lost capital city of the Joseon dynasty were found in numerous textual records. The places symbolizing Hanseong were gradually dismantled. This space was filled with buildings that symbolized colonial rule. The construction of the modern city of Gyeongseong was commemorated by various events and popular media. While Koreans enjoyed a new visual experience of witnessing the birth of a modern city, they worried that the Japanese would occupy Bukchon (North Village), the Korean territory in the city. In this process, they recognized and remembered the places symbolizing the old capital city of Hanseong that was disappearing and fading into oblivion. As a result, the urban image of the new capital city of Gyeongseong was filled with Korean people’s sorrowful memories of Hanseong.
After the mid-1920s, Gyeongseong came to be called Dae-Gyeongseong (Great Gyeongseong). The image of Dae-Gyeongseong was created and constantly reproduced in popular media. The rise of modern consumer culture played a key role in the proliferation of the urban image of Dae- Gyeongseong. However, the image of Dae-Gyeongseong was nothing but an illusion. In the urban space of Dae-Gyeongseong, the difference between Namchon and Bukchon was extremely huge to the extent that they appeared to be two separate cities. In this situation, the city-dwellers of the time saw themselves as fragments in the city. The flaneur was one of them. The flaneur who did not belong to either Namchon or Bukchon strolled the streets of Daegyeongseong. The sense of alienation and uncanniness that the flaneur felt was inseparable from the fragmented urban landscape of Dae-Gyeongseong. The urban image of Dae-Gyeongseong can only be achieved by a synthesis of fragmented images rather than a singl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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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37 | 0.37 | 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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