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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지역 3·1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 The Background and Deployment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Milyang of Gyeongsang-Namdo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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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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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1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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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yang’s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can be divided into demonstrations in Milyang-myeon and its surrounding areas, and Danjang-myeon demonstrations led by Pyochungsa(Temple) monks. In time, Man-Se demonstrations were held in Milyang-myeon in mid-March. Afterwards, as the surveillance of Empire of Japan was intensified, it was entered a state of lull for a while. In early April, demonstrations of Milyang Public Elementary School’s students and demonstrations of Danjang-myeon Taeryong-ri, Bubuk-myeon Chunhwa-ri and Cheongdo-myeon Insan-ri were continuously held. Earlier on, Japanese was advanced to Milyang and they encroached not only land, but also local business and finance. Therefore, consciousness of resistance was naturally increased in the people. In this situation, nationalism education in the private school that appeared in modern era has allowed intellectuals, young students to organize and lead Man-Se demonstrations in local area society.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Gyeongsang-Namdo was developed in isolation and dispersively without leadership because of weak link to center. However, in Miryang, they sought to organize the movement in the best way possible such as regionalism, school relations, and kinship, secret association, religion, and village community. Milyang-myeon Man-Se demonstrations that centered on Milyang Market was possible because of solid network of students in Donghwa School and Milyang Public Elementary School. In other parts of the local areas, Christians and Cheondogyo have played a lot of leading role, but in Milyang, Pyochungsa monks led a large scale demonstrations. As time goes, tradition networks at the village community level exerted power. Demonstrations could take place in villages far from the city of Milyang, because the farmers actively organized and participated in the demonstrations, it was possible. In Milyang, various groups were formed after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particular, the leader of the Milyang-myeon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grown up into a key member of Euiyeoldan, an armed organization for national independence, in the 1920s. It can be seen from Milyang that the experience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nd process was being succeed and developed in local area and beyond it.
더보기밀양의 만세시위는 지역적으로는 크게 중심지인 밀양면 및 그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 표충사 승려들이 중심이 된 단장면 시위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3월 중순 밀양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이후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4월 초에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 단장면 태룡리, 부북면 춘화리, 청도면 인산리 시위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밀양은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진출하여 토지는 물론, 지역상권, 금융 등을 잠식하였고 이에 따라 민중들의 저항의식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에 새롭게 등장한 사립학교에서의 민족주의 교육은 이 학교 출신의 지식인, 청년학생들로 하여금 지역 사회의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경남지역의 3·1운동은 중앙과의 연결고리가 약했기 때문에 지도세력 없이 고립, 분산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밀양에서는 학연, 지연, 혈연, 비밀결사, 종교, 마을공동체 등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운동의 조직화를 모색하였다. 밀양시장을 중심으로 한 밀양면 만세시위는 동화학교, 밀양공립보통학교 등 학생들의 네트워크가 견고하게 작동했기에 가능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920년대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약하게 된다. 타 지역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 계통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지만 밀양은 표충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불교계가 주도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공동체 단위의 전통네트워크가 힘을 발휘하였다. 밀양읍과 떨어진 里 단위 마을에서 시위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문중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자발적, 주도적으로 시위대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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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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