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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中建의 元宗 창시와 독립운동 = Jung-Geon Kim’s Won Jong(元宗) found and Independence movement
저자
이계형 (국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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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89-32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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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의 식민지 시기 元宗을 창시한 김중건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살피고자 한다. 독립운동의 다양한 노선을 이해하기 위한 일환이다. 기독교·천도교·유학·불교를 비롯하여 일제시기 민족종교의 일환으로 창시된 대종교 등 신흥종교 등이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을 연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중건의 삶은 자신이 창시한 원종을 세상에 뿌리내리는데 일관하였다. 원종은 봉건적 전제정치제, 사회경제구조, 신분제, 가렴주구 등 모두를 부정하고 새 질서,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일제 강점 하에 놓이자 그는 원종을 통한 독립운동을 제일의 우선 목표에 두었다. 압박・피압박의 불합리한 민족 모순을 제거해야만 자신이 추구한 小共和의 이상사회을 건설할 수 있다고 여겼다. 無國 시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의 자주 독립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중건의 독립운동을 원종에서 출발하였다. 원종은 종교라기보다는 ‘주의’였던 것이다.
김중건의 독립운동은 사상이나 이념을 떠나 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일구는데 있었다. 김중건은 이를 이루기 위해 끝임 없어 통일전선운동을 펼치고자 했고, 이것이 힘들 때면 ‘독시주의’를 내세워 원종촌을 만들고 교육을 통해 원종주의자,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에 조직된 것이 대진단이다. 김중건은 대진단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고 장백현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와 통합을 이뤄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원종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국내의 신간회나 중국에서 전개된 통합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독시주의를 포기하고 ‘방향 대전환’을 선언하였으며 원종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계의 고질적인 파벌싸움에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김중건은 ‘주의촌’을 만들어 다복식 정책을 통해 원종을 실천해 나갔다. 그는 이렇듯 주의촌을 이끌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는 한편, 중국의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을 지원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김중건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부정하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공산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였다. 그는 독재 방식이 아닌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되 최소한의 역할 만을 인정하되 각 구성원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를 농촌을 중심으로 건설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무정부주의와 구별되는 점이었다.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항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를 거부한 김중건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일생동안 추구하였던 주의촌도, 원종주의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Jung-Geon Kim’s life was himself the founder of the Won Jong world to propagate and practice. Won Jong thought was to build a new order, a new society in the anti-feudal stance. Than, His country being colonized by the Japanese, Jung-Geon Kim’s first goal was to the bes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First, he thought that his pursuit of the ideal must be rid he he pressure and being oppressed pressure of ethnic contradictions will be able to build he small republican(小共和). It was in order to achieve the Mookook(無國) era, prior to that necessarily independence of Korea should be done. Won Jong was of the religion rather than principle.
He wanted to integrate the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rather than ideology or philosophy emphasizes. For this, he seamlessly integrates movement has evolved. When it was difficult to think, He standed on independent doctrine, formed Won Jong town and than He cultivated people of a Won Jong ideologist, independentista through education. Then the DaeJin Organization(大辰團) was organized. Through the DaeJin Organization, Jung-Geon Kim was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have achieved the integr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in in Jangbaekhyeon. He did not insist on Won Jong always.
He gaved up extremely selfishism to actively participate in integration movement Being deployed in Korea or China, declared the direction of a major shift. But, because of the chronic faction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 even that was not easy. So, after He made the ism-town, wanted to practice out Won Jong through great happiness way(多福式) Policy.
He established the strategie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leading to the ism-town and unfolded anti-Japanese struggle combine with Chinese Jilin nation's salvation army, and Supported Korea independence army that Jicheongcheon led.
He was negative capitalism and embraced socialism, but refused the communist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He acknowledged the existence of a state which is not a dictatorial manner, but was recognized only a minimal role and wanted to build a rural-oriented society that respects the individuality and freedom of each member. It was a distinct anarchist at the time. So, He did not sympathize with communism, as well as was against this. But eventually he was killed by the Communists and lost everything that he was sought lifetime.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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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05-02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A Laboratory of Korean Studies -> Institute of Korean Studies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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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3 | 0.3 | 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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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 0.38 | 0.553 | 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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