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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전반기 정국의 동향과 李審度 獄事의 전말-『親鞫日記』와 『推案及鞫案』을 중심으로- = Politics in the early half of King Sunjo’s reign, and the Yi Shim-doh(李審度) Controversy -Examination of Chin’guk Ilgi(親鞫日記) and Chuan-gub-Gugan(推案及鞫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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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宣祖 이후 士林 세력이 東人․西人, 南人․北人으로 分黨된 후, 肅宗 연간 老論․少論으로 나뉘었다. 英祖․正祖는 각각의 정치세력을 調劑하여 保合하는 蕩平政治를 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戚臣 세력의 정치 참여가 계속되고 혜경궁 집안의 홍봉한 세력과 정순왕후 집안의 김귀주 세력이 反目하여 북당․남당으로 일컬어졌다. 순조 8년 이심도가 상소에서 이들을 時派․僻派로 연결하였고, 이로 인해 ‘이심도 옥사’가 일어난다.
정조가 훙거한 후, 純祖 초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경주 김문 척신 세력과 연합한 심환지 등의 벽파 세력은 순조 1년 종친 은언군, 홍봉한의 아들 척신 홍낙임 세력과 남인 信西派 세력을 포함한 정조의 노․소론 측근 세력에 대한 討罪의 일환으로 ‘辛酉獄事’를 일으켰다. 순조 2년 삼간택이 성사되어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었고, 순조 3년 정순왕후의 撤簾과 순조 4년 순조의 親政이 펼쳐졌다.
순조 5년 ‘김달순 옥사’가 일어난 후 순조 6년의 벽파 세력에 대한 토죄의 일환인 ‘丙寅更化’가 일어나 정국과 정치세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병인경화’ 후에도 노론 세력 내에서는 ‘이경신 옥사’와 관련한 추국 사건과 소론 세력 내에서는 정동준과 관련한 사도세자 추숭 세력 추국 사건이 일어났다.
순조 8년 혜경궁 집안의 척신 세력 홍세주의 정계 진출을 반대한 대사간 李審度가 상소를 올렸으나 삭직과 정배․찬배․위리안치되었다. 노․소론을 막론한 신하들의 요청으로 순조 친정 후 처음으로 親鞫을 열었으며 犯上不道 죄로 正刑 처분을 받았다. 『親鞫日記』 공초에는 연대기 사료에 남겨져 있지 않은 金明淳과 李魯春 무리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이심도 상소를 통해서 첫째로, 기존의 양 척신 풍산 홍문과 경주 김문 세력의 정치 폐해를 지적하였으나, 벽파 세력이 몰락한 시점에서 풍산 홍문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던 반남 박문 세력과 확장되고 있던 안동 김문 세력도 연관된 사안이라고 여겨진다. 둘째로, 이 시기 노론 내에서 湖論과 洛論이 나뉘었는데, 이심도는 호론인 청주․홍주 지역의 인물이었다. 이 사건은 점차 낙론인 서울 지역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京鄕이 분기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셋째로, 척신 세력을 기반으로 한 시파․벽파의 대립을 비판하고 순조의 적극적인 국정주도를 바란 조정 내 청론 세력의 주장 또한 볼 수 있다.
순조 8년 ‘이심도 옥사’에 대해서는 영조․사도세자․정조․순조와 정순왕후․혜경궁․가순궁․순원왕후 집안과 연관된 척신 세력 등과 정조의 뜻을 따른 순조의 세신과 세가 세력을 보호하며, 사리와 체면을 중히 여긴 불가피한 처분이었다. ‘이심도 옥사’는 50여 년이 지난 철종 9년(1858)에 양 척신 세력의 정치 참여 배제를 주장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영의정 김좌근의 요청에 따라 과거 순조의 처분에 대해 철종이 바로잡아 복관의 명을 내리는 것으로 마침내 일단락이 되었다.
Since the reign of king Seonjo(宣祖), the Sarim(士林) society of Joseon continued to divide into several groups:the Easterners(Dong’in, 東人) and the Westerners(Seo’in, 西人), and the Southerners(Nam’in, 南人) and the Northerners (Bug’in, 北人). Then,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肅宗), the Westerners again diverged into the Elders(No’ron, 老論) and Juniors(So’ron, 少論). Following kings Yeongjo(英祖) and Jeongjo(正祖) managed to utilize schisms and cracks formed by all those divisions, and navigated the government through them under the so-called Tangpyeong(蕩平) Policy. Yet the In-law (“Cheokshin, 戚臣”) houses continued to join (and corrupt) the political arena, and conflicts between the Hong Bong-han faction(house of the Crown princess Hye’gyeong-gung) and the Kim Gwi-ju faction (house of Queen Jeongsun) led to themselves being considered respectively as the ‘North party(Bukdang)’ and ‘South party (Namdang),’ and later also as ‘Shipa(時派)’ and ‘Byeokpa(僻派).’ After King Jeongjo died, in the early years of King Sunjo’s reign, Dowager Queen Jeongsun oversaw the governing of the country, and during this time Shim Hwan-ji and the Byeokpa faction, in alliance with the “Cheokshin”(In- law) faction of the Gyeongju Kim house, triggered the Shin’yu-year Controversy [‘辛酉獄事’]. Ones that were expelled -in the very year Sunjo was enthroned-by this incident included a royal figure named Eun’eon-gun, Hong Nag- im(Hong Bong-han’s son)’s party, the Southerner-aligned Shin’yu faction[信西派], and the late king Jeongjo’s old Noron and Soron cronies. In King Sunjo’s second year, a royal marriage was arranged and Sunjo welcomed the daughter of Kim Jo-sun from the Andong Kim house as his new queen. Then in the 3rd year Dowager Queen Jeongsun ended her oversight of matters and Sunjo began to govern the kingdom himself the next year. Then in the 5th year, the Kim Dal-sun scandal, and in the 6th the Byeong’in-year Turnover [“Byeong’in Gyeong’hwa, 丙寅更化”], eventually led to the dismissal of certain family members of the Gyeongju Kim house (house of Dowager Queen Jeongsun), and some of its Byeokpa faction allies.
After the Byeong’in-year Turnover, within the No’ron faction a purge for the Byeokpa party which involved King Jong-su as well broke out. Meanwhile, occurred within the So’ron faction was another purge targeting a party which had been arguing for the reinstatement of late Crown prince Sado’s honor (while also involving Jeong Dong-jun). In the 8th year of King Sunjo’s reign, Dae-sagan official Yi Shim-doh(李審度), member of the Hansan Yi house, who expressed an opinion against Hong Se-ju(member of the Hye’gyeong-gung house)’s joining the government, was stripped of his rank and summarily put in exile. Officials from both the No’ron and So’ron factions demanded that he be interrogated for his arrogance, and he was ultimately tried guilty of insubordination. In Chin’guk Ilgi, Kim Myeong-sun(金明淳) and Yi Roh-chun(李魯春), who do not appear in other chronologies, are recorded as implicated parties.
Yi Shim-doh’s appeal had multiple meanings. First, considering the close relationship that was maintained between the In-law houses such as the Andong Kim house and the Bannam Park house, Yi’s appeal was an attack on other in-law houses like the Pungsan Hong and Gyeongju Kim houses. Secondly, the separation of No’ron into “Ho’ron” and “Nak’ron” ever since the time of Song Shi-yeol, which marked the divergence between the Hoseo region and the Capital Seoul area as well, was similarly reflected in the in-house divisions within the Andong and Gyeongju Kim houses, as well as the Hansan Yi house. Thirdly, as a member of the Cheong’ron(淸論) party, he was criticizing the conflicts between Shipa and Byeokpa for all the In-law houses’ feuds, and hoping for Sunjo’s leading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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