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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의 굴원론(屈原論)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 Qu Yuan in China and Korea Focused on Some C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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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한국학 Comparative Korean Studies(Comparative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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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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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초나라 충신 굴원은 역대로 중국과 한국에서 문인과 유학자들에 의해 대체적으로 높이 평가되었지만, 경우에 따라서 폄하되기도 하였다. 본고는 그 배경과 이유를 살피면서 두 나라의 문인에 의해 소환된 굴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한 것이다. 이는 굴원을 알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한나라와 송나라 때의 굴원상은 충절과 청렴함으로 일월처럼 빛났다. 다만 後漢의 반고는 굴원의 투신에 의문점을 표했다. 당ㆍ송 시대 유배객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투영하여 굴원을 소환하였다. 이들은 굴원처럼 충언을 고하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보였다. 중국 근대 변혁기의 굴원 소환은 불의에 항거하는 투쟁가 굴원이었다. 외세에 의해 민족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흔들렸던 근대의 중국은 충절로 뭉친 불굴의 의지를 지닌 굴원이 필요했다.
한국의 신라시대 굴원은 충절가였다. 하지만 당나라에서 벼슬하던 최치원은, 굴원이 현실 타협적인 어보(漁父)의 삶에 초점이 맞춰 있어, 타국의 고단함을 읽히게 하였다. 또한 고려 무신정권 시대를 살았던 이규보는, 굴원이 죽음으로써 군왕의 악만을 드러내는 꼴이 되었다고 혹평하였다. 하지만 고려 말기 충신 정몽주는 굴원의 외교적 능력을 높이 샀다.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의 고려는 풍전등화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전기 굴원상은 훈구세력과 사림파에 의해 차이를 드러냈다. 훈구세력은 현실 지향적인 태도로 자신의 삶에 안주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굴원의 마지막 행적인 추방된 삶을 따르고 싶지 않다는 뜻을 보였다. 이에 반해 사림파는 굴원의 충절을 본받으면서 굴원처럼 추방되어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생육신들도 굴원의 충절을 예찬하면서 자신의 본심을 드러낼 수 없는 상태에서는 굴원이라는 문학적 소재를 빌려와 우국충절의 뜻을 표현하였다. 사화기(士禍期)의 일부 유학자는 굴원의 지조보다는 세상인심에 따라 처신할 것을 은연 중에 비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는 실학자들 중 유배와 관련된 인물들이 굴원을 소환하였는데, 대체로 우국충절의 소유자로 예찬하면서 숭모의 대상으로 삼은 점이 사림파와 비슷하였다. 다만 정약용은 道가 서지 않은 시대에 출사한 굴원이 비극을 자초하였다고 평하였다. 구한말 독립운동가 최익현은 굴원처럼 혼자 죽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으며, 황현은 굴원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였으며, 행동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한 결과 자결로 이어졌다. 이는 굴원의 변함없는 우국충절을 계승하면서 조선 유학자의 선비정신을 드러낸 경우이다. 나라가 망함에 대한 선비로서의 책임감에 통감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굴원상은 문인과 유학자들이 처한 역사적 환경과 처지에 따라 그들이 소환하고 변용한 의미는 조금씩 차이가 났다. 하지만 중국인과 한국인에 의해 흠모되고 있는 굴원상의 핵심은 충절가 굴원의 모습이었다.
A faithful subject Qu Yuan(屈原) of Chu State in the age of civil wars is most highly respected by writers and Confucianists in Korean and Chinese history but he is sometimes disparaged. This study researched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wo countries while researching its background and reasons. That is the way to learn Qu Yuan.
The loyalty and integrity of Qu Yuan brightly shone throughout Han dynasty and Song dynasty. However, Bango raised a question why he jumped to his death in later Han dynasty. Exiles in TangㆍSong dynasty recalled him by reflecting their feelings. They have in common in that they were in trouble by a false accusation of giving counsel like Qu Yuan. Recalling Qu Yuan was a fighter in the age of innovation of modern China. Modern China was precarious in ethnicity and thought because of foreign influence so they needed faithful Qu Yuan with indomitable will.
Qu Yuan was a faithful subject in Silla Dynasty of Korea. Choi Chi-won, who took up a public office in Tang Dynasty, said that Qu Yuan focused on complacent life as a fisherman, leading to revealing exhaustion in foreign country. Also, Lee Gyu-Bo criticized in that Qu Yuan revealed the evil of king by killing himself in Goryeo military age. However, Jeong Mong-ju thought highly of him for the ability in diplomacy in the late Goryeo dynasty. It is because Goryeo lay in an extremely precarious state during the transition of Yuan Dynasty and Ming Dynasty.
The image of Qu Yuan in the early of Chosun Dynasty was different depending on Hungu-pa and Sarimpa. Hungu-pa was reality-oriented and seemed to settle for the present, and did not follow exilic life as Qu Yuan’s last life. Hungu-pa follow the loyalty of Qu Yuan and stuck to their convictions although they were purged from public life. 6 loyal vassals who survived(Saengyuksin) admired the loyalty of Qu Yuan and expressed patriotism and loyalty borrowing literary subjects because they could not disclose their real intention. Some Confucian scholars implied that they would behave following public mind rather than fidelity of Qu Yuan in the period of massacre of scholars. Silhak scholars recalled Qu Yuan as an exile in the late of Chosun but they admired him for his patriotism and loyalty and yearned for him, which is similar to Sarimpa. However, Jeong Yak-yong said that Qu Yuan brought misfortune upon himself because he entered government service in the period of unstable Tao. The independence activist Choi Ik-hyun regarded Qu Yuan’s death as meaningless because he killed himself in the late period of Chosun. Hwang Hyeon reflected Qu Yuan onto himself and killed himself, lamenting his indecision. It indicates he inherited constant patriotism and loyalty of Qu Yuan and the spirit of Confucian scholar in Chosun. He took it hard that a country perished.
To sum up, the image of Qu Yuan in Korea and China is a bit different depending on historical environment and circumstances of writers and Confucianists in that they transformed and recalled the meaning. However, the essence of Qu Yuan image is a patriot that Chinese and Koreans ado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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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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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9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Comparative Korean Studies -> 비교한국학 Comparative Korean Studies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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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49 | 0.49 | 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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