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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요동에서 사행(使行) 호송군(護送軍)의 역할과 국제무역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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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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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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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29(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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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 전기 조선 의주와 요동의 요양을 오간 조선 호송군에 주목하여, 호송군의 활동을 파악하고 그간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조선 전기 변경사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 전기 조명외교에서 호송군이란 명(明)의 북경(北京)으로 떠나는 조선사행단을 의주에서 요양까지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군부대를 일컫는다. 15세기 의주에서 연산관에 이르렀던 요동 지역 일대는 명의 영토가 아니라 조선과 명사이의 국경 완충지대로 존재하였으므로 도적의 습격에서 조선 사행단을 보호할 군인이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다.
호송군은 조선 대명 사행단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인력이었으며, 동원된 규모 역시 상당하였다. 호송군은 평안도민에서 선발하였다. 하나의 사행마다 호송군을 50~100여 명 정도만 동원해야 했지만, 실제로 많게는 1,000여명까지 동원하는 등 호송군 수는 북방 성식의 상황과 사신의 품계에 따라 가변적이었다. 동원 기간을 살펴보면, 하나의 사행단을 호송하기 위하여 평균적으로 대략 2개월 남짓한 시간이 소요되었으므로 15세기에는 호송군 인력을 거의 일 년 내내 동원해야 했다. 시기를 가리지 않은 호송군 동원은 백성들의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고, 이는 해당지역 백성의 동요로 이어질 수 있었다.
조선 조정은 농번기를 가리지 않고 동원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호송군의 경제적 피해를 보상해주고자 이들에게 요동에서의 국제무역을 허가하였다. 명과의 사무역을 강력히 통제하였던 조선 조정의 대외무역 정책을 참고하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조선 전기 요동에서 사무역으로 경제적 이익 획득이 가능하다고 합법적으로 고시된 자들은 호송군이 유일하였다. 호송군은 중앙 권력에 접근하지 않아도 요동에서 국제무역의 가능성이 부여된 유일한 조선 백성이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 조정이 명과의 무역을 엄금하는 국가 기조 속에서도 대명외교와 국방을 맡고 있는 평안도민의 안정을 중시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동에서 중국인과 합법적으로 무역할 수 있었던 경험의 오래된 축적은 호송군이 조선의 백성들 가운데 누구보다 국제무역에 익숙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한 호송군은 요동 지역을 수시로 왕래하며 요동의 지리와 생활환경 등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획득하고 경험했으며, 달적의 습격에 대한 대처 역시 누구보다 능숙해졌다. 호송군 임무로 요동의 정보와 지리에 익숙해진 이들은 15세기말 조선과 요동 지역의 유통경제 발달과 명의 요동팔참 장악 확대로 거주의 안정성이 확보되자, 요동으로의 이주와 불법무역을 추동하는 세력이 되었다. 의주인이 요동에서의 불법무역을 기회로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은 호송군으로서 요동무역을 경험하고, 외국인 명에 대한 정보력을 축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송군 중 일부는 그들이 가진 요동 정보를 이용하여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 그것이 요동으로 이주를 선택하게 하거나, 조선과 명 모두가 국초부터 절대불가의 영역으로 지정하였던 불법무역의 금단을 허물게 하였으며, 16세기 조선의 국제무역을 성장시킨 하나의 물꼬가 되었다. 조선 전기 중앙과 중앙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변경인으로서 조선 사회의 또 다른 변화를 재생한 주체가 요동의 왕래자 호송군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The escort soldiers in diplomacy between the Ming Dynasty and the Joseon Dynasty were sent to protect the Joseon government envoys traveling to Beijing from Uiju to Liaoyang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These soldiers were required for securing the safety of the Joseon Dynasty envoys traveling to Ming, and the scale of an embassy was large. The soldiers were recruited from residents in Pyeongan Province. As many as from fifty to 100 soldiers had to be mobilized for each envoy. However, in actuality, more than 1,000 soldiers were mobilized, and that number differed according to the situation in the northern areas. In addition, it typically took more than two months to escort the embassy to Beijing. Soldiers were mobilized regardless of the busy farming season.
The Joseon government permitted trade in the Liaoyang area in order to compensate for the economic damage caused by the soldiers. Considering that the Joseon government’s policy toward foreign trade strongly controlled private trade with Ming, these were exceptional measures.
These soldiers were the only Joseon people authorized to engage in international trade in the Liaodong area despite their not having approached the central government.
The consistent accumulation of experience through which they could legally trade with Chinese in Liaodong led these soldiers to become more accustomed to international trade than any other Joseon people. Furthermore, the soldiers frequently visited the Liaodong area and obtained more information, such as the geography and the life environment in Liaodong, than other Koreans, which made them skilled in coping with attacks by bandits. Some soldiers who became acquainted with information and geography in the Liaodong area sought a better life by utilizing their own knowledge of the region. They chose to emigrate to Liaodong or broke the prohibition against illegal trade with the Ming Dynasty that had been enforced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period.
They opened the gate for developing Joseon’s international trade in the sixteenth century. Thus it should be noted that subjects who made changes as marginal people included these soldiers who visited Liao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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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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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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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1.18 | 1.18 | 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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