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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대도소와 전라남도 동부지역의 동학농민혁명 - 김인배의 활동과 순천, 광양, 여수지역 전투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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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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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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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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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수록면
153-18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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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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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김인배와 그가 주도한 영호대도소, 그리고 영호대도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동부지역인 순천, 여수, 광양지역에서의 전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한 전라남도 동부지역 동학농민혁명군에게 김인배는 누구일까. 영호대도소의 중심인물로 1894년 6월 순천에 내려 온 이후 그는 조직적인 준비와 안정적 기반을 마련하여 통치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새로운 전투의 준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다. 김인배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25세의 나이에 영호대도소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다. 그는 김개남의 명령에 따라 순천을 장악했다. 김인배의 지도자로서의 모습은 유학과 입도 이후의 실천적 투쟁 경험이 그를 새롭게 만들었고,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의 목숨을 대의를 위해 버리는 혁명가가 되었다. 김인배가 주도한 당시 영호대도소는 1894년 6월부터 12월까지 전라남도 동부의 순천, 광양, 여수 등지와 경상도의 하등, 진주 등지를 관장하는 사실상의 통치 권력을 장악했다. 여기에는 동학교도를 비롯해 아전, 농민, 사노비 등 다양한 계층이 참가했다. 이 조직은 조직 내부의 불협화음이 보이지 않은 잘 정돈된 권력이었다. 실제로 대규모의 항일전쟁을 위해 최초로 출진한 동학농민혁명군은 김인배가 주도한 영호대도소군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과정에서 영호대도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반외세의 선봉으로 후방 방위 임무를 넘어, 혁명의 열기를 전라남도 동부지역에 전면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들 동학농민혁명군이 패배한 이유는 화력의 차이, 무력의 차이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결정적 패인의 하나는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양반과 향리들의 배반행위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김인배가 주도한 영호대도소의 동학농민혁명군은 근거지 순천을 토대로 하여 지역적 기반을 확충해 갔는데, 순천을 중심으로 체제의 안정적 기반을 갖추고 광양을 넘어 하동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에게 순천은 활동의 근거지, 광양은 경상남도 서부지역 진출의 교두보, 그리고 여수는 도서지역 진출을 위한 기반 확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이었다. 전라남도 동부지역 전투의 과정을 보면, 순천은 관아가 있어 자연스럽게 영호대도소가 접수하면서 거점이었다. 그렇지만 순천읍성 내부의 다양한 거주자의 내홍으로 인해 가장 불안정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 광양의 경우는 일찍이 동학이 활성화되었던 기반이 있어 전면적 투쟁의 종착지가 되었다. 반면에 일련의 좌수영 전투는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약화되는데 계기로 작용했다. 이곳 여수의 좌수영군은 이후 동학농민혁명군의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일본군과 함께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김인배 주도의 영호대도소와 동학농민혁명군은 전투 과정에서 농민들만이 아니라 지방 양반, 부민, 유림들까지 척왜라는 목표 아래 견인했다. 그리고 이들의 협조를 이끌어 1894년 6월부터 12월까지 치열한 전투를 통해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장악하여 해방구로 만들었다. 이후 이들은 경상남도 서부지역 진출의 근거지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을 확대하는데 기여했다. 아울러 김인배 주도의 영호대도소와 동학농민혁명군의 성과는 동학농민혁명군사에서 전라남도 지역의 활동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데 초석이 되고 있다.
더보기This paper studied on historical meaning of East Jeonra Namdo Donghak Peasant revolution & Youngho Daedoso in Suncheon, Gwangyang, Yeosu area. Who is Kim In-bae for peasant revolutionary army who had been involved in Donghak Peasant revolution? He was the main figure of Youngho Daedoso and was the leader for struggle with organized preparation and stabilization since he had moved to Suncheon. He was the leader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Kim In-bae had been lead Youngho Daedoso’ Donghak Peasant revolution when he was only 25 years old. He had dominated Suncheon area ordered by Kim Gae-nam. The figure of Kim In-bae as a leader was mostly shown by practical struggle and became the revolutionary who laid down his life for the greater cause. Actually, Youngho Daedoso lead by Kim In-bae had dominated in East area of Jeonra Namdo-Suncheon, Yeosu and Gyeongsang-do’s Hadong, Jinju from June to December in 1894. Involving not only follower of Donghak but petty officials, peasants, private slaves were participated. This was the well-organized group without making dissonance. In a reality, the first Donghak Peasant Army for large scale of anti-Japanese war was Youngho Daedoso army lead by Kim In-bae. In a process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Youngho Daedoso had done not only rear defense but became spearhead as well. These have concluded spread of atmosphere of revolution in entire Jeonra Namdo area. The reason why Donghak peasant army lost was that difference of firepower and force. One of the decisive factors of lost was due to new type-weapon from Japanese military. Also, noblemen from Chosun era and local officials’ treachery had effected as well. Youngho Daedoso lead by Kim In-bae had been based on Suncheon and developed themselves in region. They had also advanced to Gwangyang even Hadong area; Suncheon was the place for base, Gwangyang was bridgehead for entering west in Gyeongsang Namdo, and Yeosu was essential place for island area. When examining Jeonra Namdo east battle, Suncheon could have been the foothold in terms of place of government office. However, Suncheon also had become the most unstable place because of internal issues who had been lived in Suncheon Town hall. On the other hand, Gwangyang had been have a broaden foothold for Donghak so that had become destination overall fights but Jwasuyeong(Yeosu) battle had rather weaken Donghak peasant revolution. Eventually, Jwasuyeong army had subdued Donghak peasant army with Japanese army. As mentioned above, Youngho Daedoso and Donghak peasant army have been guided not only peasant but also Confucians, Vagabonds with the goal of Anti-Japanese. Throughout many of cooperation, it is true that they had made Jeonra Namdo as haven by many of fierce battles from June to December in 1894. Since then, these group had established a base in Gyeongsang Namdo western area and contributed to Donghak peasant revolution. Finally, Youngho Daedoso and Donghak peasant army lead by Kim In-bae clearly had became cornerstone of history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army in Jeonra Namdo.
더보기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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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9-07-15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The Historial Association of Soong-sil -> The Historical Association for Soong-Sil | KCI후보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5 | 0.75 | 0.6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 | 1.348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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