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聽蟬 李志定(1588-1650)의 書藝 = Calligraphy of Cheongseon Yi Ji-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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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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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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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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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09(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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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聽蟬 李志定(1588-1650)의 생애와 그의 서풍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지정은 자가 靜吾, 호가 聽蟬이다. 아버지 李尙毅와 어머니 尹晛의 딸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616년 別試文科에 급제하여 義禁府都事를 초임으로 여러 內職을 거쳤으나, 仁祖反正(1623) 이후로 대북세력이 정권에서 축출됨에 따라 주로 외직을 전전하며 安山․永興 등 7곳의 수령을 지냈다. 그는 어려서는 형제들, 그리고 眉叟 許穆(1595-1682)과 함께 蔥山 鄭彦訥(1545-1612)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大東書法≫을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는 만년에 사위 李烓(1603-1642)의 죄에 연좌되어 1642년(인조 20) 成川府使직에서 파직당한 뒤 知己 李敏求(1589-1670)의 유배지인 충남 牙山에 인접한 鷄頭里라는 곳에 거처하며 이민구와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또한 西湖 가운데 조그만 정자를 짓고 그 편액을 ‘聽蟬’이라 하였으며, 이를 자호로 삼아 翰墨으로 여생을 즐겼다고 한다. 이지정은 17세기 전반에 글씨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그는 여러 서체 가운데 유독 초서를 좋아했으며, 현전하는 필적도 대부분 초서이다. 그는 明 張弼(1425-1487)을 수용한 孤山 黃耆老(1521-1725이후)의 초서풍을 사숙하여 일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황기로의 서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황기로의 글씨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극대화시킨 서예가이다. 그의 글씨는 황기로에 비해 필획의 肥瘦의 변화가 두드러지며, 減筆法으로 쓴 간결하고 굳센 필획이 큰 특징을 이룬다. 그의 서풍은 종질인 梅山 李夏鎭(1628-1682), 이하진의 아들 李漵․李瀷 형제, 손녀사위 李命殷(1620-1685) 등에게 이어졌다. 이지정의 글씨는 이들 후손들에 의해 가전되며 새로운 양상을 띠며 변모해갔으며, 李漵에게 서법을 전수받은 南夏行(1697-1781)에 이르러서는 이지정의 서풍뿐만 아니라 전대 초서 명가들의 서풍이 복합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지정은 16세기에 형성되었던 황기로의 초서풍을 조선 후기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동시에, 개성적인 필치가 강한 조선 중기의 초서풍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보다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지정의 문집이 전하지 않아 그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기 어렵고, 필적 역시 적은 수가 남아있어 그의 글씨를 폭넓게 조망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관련 자료가 발굴되어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더보기This paper aims to examine th life and calligraphic style of Cheongseon Yi Ji-jeong (李志定, 1588-1650), who was active in the early 17C. Yi Ji-jeong's second name is Jeongo (靜吾) and pen name is Cheongseon (聽蟬). He was born as the fourth son of his father (Yi Sang-eui) and mother (daughter of Yun Hyeon). He passed special state examination in 1616 and has consecutively filled many central government office stating with Uigeumbu Dosa, his first appointment. However, he was expelled from central power along with the northward regime after Injo Revolution then had changed several local posts, including Ansan and Yeongheung, as governor. It is said that he had studied under Jeong Eonnul (1545-1612)'s instruction along with his brothers and Heo Mok (1595-1682) in his childhood. He was known to have written Daedongseobeop, but with no written record for that fact. After he was involved in the crime of son-in-law Yi Gye (1603-1642) and dismissed from the post of Seongcheon district governor in 1642(Injo 20), he had changed close incherchange with his appreciative friend Yi Min-gu (李敏求, 1589-1670) at Gyedu-ri near Asan, Chungnam Province, or his place of exile. Also, he set a small pavilion
at the middle of Seoho (西湖) and named it Cheongseon, then enjoyed his remaining years with the same pen name and Calligraphy. Yi Ji-jeong is a prominent calligrapher in the early 17th Century. He showed favoritism for cursive script, as most of his calligraphic specimen are cursive script. He had emulated Hwang Gi-ro (黃耆老, 1521-after 1575)'s cursive script who admired Zhang Bi (1425-1487) of Ming dynasty, establishing his own fame.
He had maximized the characteristics of Hwang's calligraphic style after the most earnest study of his works. His calligraphy has more versatile changes in storke width, also has a unique characteristic of concise and strong stroke written by omission stroke. His calligraphic style was handed down to his nephew Yi Ha-jin
(1628-1682), his sons Yi Seo․Yi Ik, grandson-in-law Yi Myeong-eun (1620-1685) and so on. His calligraphic style had changed with new aspects, at his descendants' hands. Nam Ha-haeng (1697-1781), who was inherited from Yi
Seo, showed at last a combined aspect having not only Yi Ji-jeong's style but also the earlier masters in cursive script. In this respect, Yi Ji-jeong did a bridge role to deliver 16C's Hwang Gi-ro's cursive script to the late Joseon and had a significant effect on that the subjective cursive script of the mid-Joseon could
be diversified in the late Joseon. Because his collection of works do not exist currently, his life cannot be
examined with comprehensive manner. The number of his calligraphic specimen is unsatisfactory for extensive study. More materials are being expected for further in-depth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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