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기획논문 : 일제시대의 사회변화와 강루리 안동권씨의 대응 = Response of Kangruri Andong Kwon Family to Social Changes in the Latter Era of Chosun Dynasty and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151.52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36(36쪽)
제공처
소장기관
조선 초기 단성(丹城)에 들어온 안동관(安東灌)씨는 단계리를 중심으로 다른 마을로 뻗어가 독자적인 파를 형성하며, 이지 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명망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霜녑公派(愚川公派)도 그 중의 하나이다. 안동권씨 상암공파 (우천공파) 가문은 남원학풍(南寃學風)을 잇는 입장에 있었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서인·노론화해 갔다. 강루리 일대에 세거해 온 이들은 성주리(星州李)씨 동곡공파(桐谷公派)와 함께 주자(朱子) ``와 우엄(尤奄)의 영정을 봉안하는 신안서원(新安書院)의 운영을 주도하고 있었다. 조선 말기 신안서원이 훼철된 후에도 양 가문은 이곳에 신안정사(新安精舍)를 중건하였다. 이곳이 영남 및 다른 지역의 노론계 유명 인사들이 자주 찾는 주요한 곳이 되면서, 강루리 안동권씨는 전국의 주요 명사들과 교유하고 그들의 학문적 영향도 받았다. 강루리 안동권씨 인물 중에는 로사학파(蘆沙學派)를 추종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이외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인도 있었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도 일부 있었다. 그리고 안동권씨는 다른 학파나 다른 당파의 인물과 교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구한말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강루리 안동권씨도 적극적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 인사는 단발령 등의 시책에 저항하고 의병 에도 참여하려 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독려로 전국적으로 곳곳에 신식학교가 세워졌다. 그런데 많은 신식학교는 민족적 입장은 모 호하고 오히려 친일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신교육 운동이 확산되자 단성에서는 이에 대한 유림 들의 저항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 나 사회의 변화속에 서당의 ``구학(舊學)`` 교육은 점차 위축되고, 명망 가문의 자제들도 자발적으로 신식학교에 입학하는 사례가 점차 확산된다. 그러나 안동권 씨 내의 일부 뜻있는 인사들은 ``구학``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특히 권재규(權載奎)는 유림의 임무가 구학을 독실하게 지키고 자제들을 지성으로 인도 하여 유교적 학문을 익히도록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생도들에게 구학을 배 우는 올바른 자세를 계속 강조하고 있었다.
더보기In the beginning of Chosun Dynasty, Andong Kwon Family (安東灌) settled down around Dankye-ri having moved into Danseong(丹城). The family eventually expanded their influence to other villages and made it clear that they were the most prestigious family in the region. Sangamgong-pa(霜녑公派) (Woocheongong-pa 愚川公派) was one of the family. Sangamgong-pa (Woocheongong-pa) Family of Andong Kwon Family was supposed to inherit Nammyeonghakpoong(南寃學風) but from the aspect of politics, the family had slowly joined Seoin·Noron Group. As they were residing in Kangru-ri with Donggokgong-pa(桐谷公派) of Seongju Lee Family(星州李), they looked after Shinanseowon (新安書院) in which portraits of the deceased Juja(朱子) and Wooahm(尤奄) were enshrined. Even after Shinanseowon was demolished in the latter era of Chosun Dynasty, both the families built Shinanjeongsa(新安精舍) in the region, As a more number of renowned figures in Yeongnam and other regions frequently visited the region, Andong Kwon Family in Kangruri was able to communicate with nationwide major figures and were affected by them in a scientific manner. Many of Kangruri Andong Kwon Family admired Nosahakpa(蘆沙學派) but still, there were a few writers such as Myeonahm(勉菴) Choi Ik-hyun(崔益鉉), Yeonjae(淵齋) Song Byeong-seon(宋秉璿) and Kanjae(艮齋) Jeon Woo(田愚). In addition, Andong Kwon Family was willing to interact with figures from other schools or other factions. In the rapid social changes during the latter era of Chosun Dynasty, Kangruri Andong Kwon Family was also one of them who were decisively with Weejeongcheoksa(衛正斥邪). Some of them were even fighting against policies such as the ordinance prohibiting topknots and showed willingness to join an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After Kabohkyeongjang, new schools were built everywhere by unsparing support and encouragement of the central government. However, those new schools did not take the ethnic stance but rather were favorable to Japan. As such new education move became stronger, Yoorim(儒林) in Danseong started to resist the change in various ways. Nevertheless, the social changes weakened ``the traditional education (舊學)`` by Seodang and the growing number of offsprings of the renowned families voluntarily signed up for the new schools. However, despite the change, some figures in Andong Kwon Family were trying to preserve ``the traditional education``. In particular, Kwon Jae-kyu(權載奎) kept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the traditional education`` to his students strongly believing that the duties of Yoorim were to sincerely preserve the traditional education and to lead the students to the world of intelligence.
더보기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