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해방후 천도교세력의 정치운동
저자
발행사항
서울 :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0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10. 8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발행국(도시)
서울
기타서명
(A) Study on the Political Movements of Chundogyo, 1905-1948
형태사항
vii, 239 p. : 삽화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김성보
소장기관
이 논문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후 신국가건설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천도교세력의 활동양상과 지향점을 분석한 연구이다. 1894년 농민전쟁 이후 손병희를 중심으로 개편된 동학은 활동 방향을 문명개화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1905년 동학을 천도교를 재편하고, 人乃天을 교리로 공식화하였다. 人乃天主義의 이상은 地上天國의 건설이었다. 지상천국은 그 시대에서 더 좋은 새로운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내천주의와 지상천국에 대한 인식은 천도교세력이 현실사회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교화는 물론 정치?경제 등 제반 사회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性身雙全ㆍ敎政一致’論으로 정리되었다. 이 논리에 따라 천도교가 현실문제ㆍ정치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천도교세력이 3ㆍ1운동에 참여한 것 역시 물질적 제도개혁의 일환으로서 정치개혁을 바라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20년대 초 한국사회 내에서 산업진흥ㆍ교육보급 등 實力養成運動을 전개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하는 가운데 천도교 지도자들은 실력양성은 일정한 지도이념에 바탕을 둔 ‘政治組織’에 의해 전개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결성된 것이 天道敎靑年黨이었다. 정치조직으로 결성된 청년당은 以黨開闢을 표방하는 가운데 다른 제 사회세력과의 연대보다는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정치운영을 추진하였다.
한편, 1925년에 천도교단은 교주제 부활문제를 표면적 이유로 權東鎭 李鍾麟 등을 중심으로 한 舊派와 崔麟 鄭廣朝 李敦化 등을 중심으로 한 新派로 분화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 천도교의 분열은 당시 민족주의 운동의 분화와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구파세력은 일제와의 비타협적 정치투쟁을 위해 다른 사회세력과의 연대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반면에 천도교인의 대부분과 실질적으로 천도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한 신파세력은 일제와 타협ㆍ협력하는 가운데 청년당을 통한 천도교 중심의 독자적인 활동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국내외 정세가 자치운동 추진에 유리하게 작동하지 않자 신파세력은 자치운동을 유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교 신파세력이 192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활동을 전개한 것은 그들의 민족 인식과 관련이 있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민족주의를 ‘利己主義의 大結晶’으로 보았으며, 민족과 민족을 대립케 하는 원인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천도교세력은 기존의 민족주의를 대신한 ‘汎人間的 民族主義’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민족 내부에서 어떤 한 계급의 전유물이 아닌, 민족 구성원 전체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보편적ㆍ추상적인 개념의 민족주의였다. 이를 확장하면 민족 내부에서 지배?피지배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듯이 민족 간에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제국주의 질서와 ‘민족국가’ 단위의 세계질서를 비판하면서 ‘世界一家主義’를 주장하였다. 세계평화의 완성을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국제주의와 인류주의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이 관점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世界一家’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각 민족이 세계에 통할만한 지식?도덕?사상 등을 지녀야 했기 때문에 민족의 생활정도와 문화를 향상?발전시키는 위한 民族開闢이 우선 과제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朝鮮民族 自治’가 합리화되었다. 조선민족이 당면한 현실을 무시하고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세계일가라는 궁극적 목표가 전제되었지만 그 단계적 발전과정과 당시 한국사회의 조건이 고려되면서 세계일가에 참여하기 위한 당면한 현실 목표로서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의 ‘조선민족 자치’가 설정된 것이었다.
천도교 신파세력이 구상한 ‘조선민족 자치’의 구체적 실현 형태는 영국과 캐나다나 호주 등 영연방 국가들 간의 관계였다. ‘연방국가’는 ‘세계일가’ ‘世界聯邦’으로 나가는 과도기였다. 천도교 신파세력은 이와 같은 방식을 통해 조선과 일본의 ‘분리’를 추구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민족 자치’는 천도교 고유의 종교적 목표인 ‘세계일가’를 향해 가는 주체적 실천과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보편을 지향하는 종교논리와 민족본위가 국가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정치논리가 상호 결합된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천도교 신파세력이 가장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자치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은 이처럼 자치를 종교원리에 입각한 자기 논리화된 노선으로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 천도교 신파는 농민운동?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당시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朝鮮運動의 領導權’을 주장하며, 사회주의자들과 충돌하였다. 하지만 1930년대 일제가 농촌통제정책을 추진하고 사상통제를 강화하자 천도교 신파세력은 활동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재조정하였다. 이들은 정치운동에서 물러서 생활운동?문화운동 등 비정치적운동으로 활동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천도교단과 청년당의 조직을 중앙집중화된 형태로 재정비하여 내부 결속을 다지고, 천도교 신앙의 확립을 강조해 정치운동에서의 후퇴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청년당의 운동노선을 전환하여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교단내적인 수련?수양활동에 치중하고, 1934년에 설립된 時中會에 적극 참여하는 등 종교색채의 강화와 잠재적 정치활동을 위한 기반 모색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천도교세력은 중일전쟁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표명하고, 전국적인 교단조직을 활용하여 시국강연회?특별기도회?출정병사 환송 등 친일협력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적극적인 친일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천도교세력의 세계인식 자체가 변화하는 가운데 이를 천도교 사상과 내면적으로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천도교세력은 인종적 세계대결에서 승리할 일본에 융화되어야만, 즉 皇民化 되어야만 새로운 신질서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性身雙全?敎政一致의 논리를 황민화와 연결시킴으로서 종교 내면의 친일논리를 마련하였다. 즉 性身雙全을 ‘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천도교인으로서 道力을 기르는 것으로, 敎政一致를 천도교의 역할인 종교와 국가(=일본제국)의 몫인 정치의 분리 속에서 종교와 정치가 협력?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은 천도교세력의 친일화 과정에서 大東方主義가 천도교의 공식노선으로 천명되었다. 大東方主義는 더 이상 민족 독자의 생존을 모색하지 말고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이 협동하여 黃人에 의해 동양을 수호하자는 것이었다. 그 논리적 근거로서 민족을 넘어선 최종적 단계로서 人類愛?人類主義가 제시되었고, 東方은 세계를 동서로 구분하는 東學의 기본 논리 속에서 인류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로 설정되었다. 동방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는 조선민족의 권익?문화 등의 향상을 목적으로 한 ‘조선민족 자치’는 포기되어야 하며, 두 민족의 융합을 통한 공동번영이 추구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을 합한 동방민족, 즉 일본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는 새로운 ‘國家民族’ 속에서 內鮮一體를 통하여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國民化의 논리는 모든 이상의 건설과 현실적 생존의 근거를 국가로 보고 국가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과 헌신을 강조하는 國家至上主義로 연결되어 졌다. 일제에 대한 충성과 협력이 천도교 본래의 사회적 실천이라고 상정됨으로써 천도교세력의 친일활동은 종교적 실천의 위상을 갖게 되었고, 친일은 종교생활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강렬한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천도교세력은 새로운 환경에 대응해 활동을 재개하였다. 우선 각 지역의 天道敎靑友黨 조직을 복원하려고 하였으며 활동재개의 명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920년대 정치운동을 전개할 때 주장했던 의미의 ‘性身雙全?敎政一致’論을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해방 후 상황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민족의 완전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규정하여 자신들의 정치활동 재개에 명분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또한 崔麟으로 대표되는 친일 인사의 출교를 통해 천도교의 이미지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천도교세력은 남북한에 각기 천도교청우당(이하 남조선청우당)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남조선청우당은 좌우합작?남북통일의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동위원회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난항을 거듭되자 천도교 세력은 유엔감시하 남북총선거가 통일의 마지막 기회라고 판단하고 이를 지지하였다. 이것은 결국 단정세력과 행보를 같이 하게 되는 것이었으며, 천도교 세력의 우경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지역에 조직된 북조선청우당은 북조선로동당과 역사적인 유대관계나 계급기반?이념 등에서 상호 협조적일 수 있었으며, 그것은 당시 북한에서 진행된 제반 사회개혁의 추진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북조선청우당이 북조선로동당?소련주둔군과 협조관계만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북한 정권의 권력문제나 민족국가 건설 문제 등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천도교세력은 세계주의를 토대로 한 ‘신민족주의’, 노농민주정치를 단계로 하는 ‘신민주주의’를 주창하였다. 즉 침략적 제국주의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주의에 기초하여 이를 실행하는 단위로서 民族自主를 표방하였고, 자본주의정치에서 노농민주정치로 나아가는 것을 역사발전의 진행방향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좌우대립이 격화되고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길이 위기에 처한 상황 속에서 천도교세력은 자본가 본위의 서구식 자본주의 경제체제나 노동자 본위의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체제 모두를 비판하는 가운데 ‘朝鮮的 新民主主義’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우당의 ‘朝鮮的 新民主主義’ 국가건설 구상은 남과 북이 대립하고, 남북분단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국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로 귀결된 남북한 체제에 흡수?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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