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친일정치운동 연구 : 자치·참정권 청원운동을 중심으로
저자
발행사항
서울 :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0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2010. 2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발행국(도시)
서울
기타서명
A study of pro-Japanese political movements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 centering on the petition movement for autonomy and suffrage
형태사항
v, 311 장 : 삽화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김도형
소장기관
본 논문은 일제하 자치·참정권 청원운동을 통해 전개된 친일정치운동을 소재로 일제하 친일세력의 논리와 활동과정, 그리고 근대국민국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일제하 친일정치운동세력은 직접적으로는 일제하에 형성, 활동하였지만, 그 인적, 사상적 기원은 이미 한말에서 시작되었다. 근대화가 개화관료, 지식인 중심의 정권장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급진적 정치운동세력과 지배체제 전반에 도전했던 동학세력 일부가 그 뿌리였다. 이들은 일제의 침략을 정치적 재기와 정권장악의 호기로 생각하고 일제의 침략을 용인, 혹은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보호국체제하의 정권장악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군주와 인민 모두를 근대화과정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화세력 중심이 된 ‘민당’ 의 권력장악만이 근대화의 첩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일제의 침략, ‘보호통치’를 용인했던 세력들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분립하며 상호경쟁, 투쟁하였다. 대표적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지도부를 장악하고 보호통치 하의 정권장악운동을 전개했던 세력과 일본과 직접 결합하여 합방운동을 전개한 일진회세력이었다. 전자는 정권장악운동의 논리 하에 보호국체제하의 내각장악운동을 전개하였고, 후자는 합병에 의한 일제지배체체의 전면화를 추구하였다. 전자는 한국사회의 신주류집단인 신흥지주, 자산계층, 요컨대 유지, 신사층을 중심으로 일제지배와 일면 타협하며 권력을 장악하려 한 것이었다. 반면 후자는 노골적 친일활동, 비주류세력으로서의 한계에 따라 정치, 사회적 고립화가 심화되자, 일본국민으로서 지배권력의 일원이 되는 합방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었다. 전자는 일제하 자치청원운동으로 후자는 참정권청원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일제하 친일정치운동이 본격화된 계기는 1919년 3·1운동이 계기가 된 지배정책의 변화였다. 3·1운동으로 조선통치의 한계를 절감한 일제가 ‘내선융화’의 첨병이 될 세력으로 친일정치운동세력을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친일정치운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유민회, 동광회 조선총지부의 자치청원운동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속령자치론이었다. 일제의 영속적 지배를 전제로 내정의 독자화를 추진하여 조선사회에서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민협회의 참정권청원운동이었다. 민족구분 없는 국민화를 통해 일본과 조선을 완전히 통합하고, 조선인이 일본제국의회에 진출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것이었다. 두 운동은 일제의 지배를 영구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나 전자가 조선인 상층부의 결속을 통해 조선통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려한 것이라면, 후자는 조선과 일본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여 새롭게 지배체제의 중심이 되려한 것이었다. 때문에 전자는 지주, 자본가계층의 실질적 이익확보, 내정독립, 조선인본위와 같은 문제를 중시하였고, 후자는 내지연장주의의 확대와 중의원 참정권 획득에 주력하였다.하지만 자치청원운동은 1920년대 초반 곧 쇠퇴하게 되었다. 부르주아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려 하였지만, 내지연장주의의 확대 속에 정치적 규합의 근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20년대 전반 친일정치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한 것은 국민협회였다. 1920년 1월 창립된 국민협회는 한말정치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과 1910년대 총독부의 관리였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였다. 특히 핵심인물인 민원식, 김환, 김명준 등은 일진회 참여자였다. 내지연장주의에 호응한 국민협회는 총독부의 지원 속에 지방지부를 건설하며 세를 불려갔다. 국민협회의 핵심논리는 병합의 의의가 조선과 일본의 국가적 통합에 의한 대국가로의 재탄생에 있으므로 신일본국민으로의 정체성 전환에 의해 병합이 완성된다는 신일본주의였다. 민족은 동화되기 힘든 자연적 조건이지만, 국가는 민족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인위적 결합체라는 것이었다. 참정권부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조건이었다.국민협회는 1923년 일본 내에서 보통선거실시가 예정되자,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활발한 참정권청원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민협회 중심의 친일정치운동은 1924년 정우회내각이 헌정회내각으로 바뀌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본국내각의 입장을 반영한 정무총감들은 총독부의 예산을 축소하였고, 그 과정에서 기존 친일정치운동세력들에 대한 지원도 축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역시 조선통치의 독자화를 위해 자치제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모두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한 친일정치운동세력들의 입지를 위축시키는 것이었다.그리고 이러한 입지위축에 대해 국민협회는 강력히 반발하였다. 국민협회는 총독부의 지배정책과 정책당국자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참정권부여 없는 조선통치는 노예의 통치라고 주장하였다. 총독부는 이에 대해 친일정치운동의 무능함을 비판하며 검열과 취체로 대응하였고 양자의 관계는 갈등관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제한적 참정권획득을 주장하는 갑자구락부가 참정권청원운동의 전면에 부각되었다.이상의 친일정치운동의 전개양상은 각 정치주체가 추구한 목표의 차이, 정치사회적 조건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조선총독부에게 친일정치운동의 존재이유는 조선사회 포섭도구였다. 때문에 1920년대 이래의 민족운동의 발흥, 그로 인한 지배체제의 동요는 친일정치운동의 효용가치를 재고하게 하였다. 또 정당내각의 경우 내지연장주의를 식민지통치체제 에 대한 영향력 강화논리로 활용하려 하였다. 따라서 내지연장주의를 정치적 권리의 동일화문제로 부각시키는 참정권청원운동은 부담이었다. 반면 참정권청원운동세력에게 조선인이 차별 없는 일본국민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논리는 정치활동의 근거였다. 따라서 참정권 부여에 대한 일제의 소극적 태도는 그런 정치적 전망을 허구화시키는 것이었다.한편 1929년 척식성관제개정을 둘러싼 논란은 참정권청원운동세력에게 더 큰 충격을 가하였다. 척식성 설치는 식민지 관할부서인 척식성이 조선 역시 관장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조선이 식민지임을 제도적으로 분명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내지연장주의를 조선인의 일본국민화, 권리의 동등화로 이해하고 선전하였던 참정권청원운동세력의 존재기반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갑자구락부, 국민협회 등 친일정치세력은 격렬히 저항하며 반발하였다. 그러나 척식성이 척무성으로 명칭만 바뀐 채 척무성에 의한 조선통치 개입이 가능하게 되자 참정권청원운동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결국 점차 약체화되던 친일정치운동은 1931년 제2차 지방제도개정을 계기로 활동이 쇠퇴하게 되었다. 지방자문기관의 의결기관화가 결정되자, 지지기반의 인물들이 실질적 이익확보를 위해 지방자치제 참여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또 운동단체의 간부들도 중추원 등에 자리를 확보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친일정치운동세력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추원등 지배체제 내 제도기구에 적극 편입하거나, 지배정책을 선전, 협조하는 선전기관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요컨대 친일정치운동은 세계적 생존경쟁 속에 대제국, 대국가의 일원이 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패권적 세계인식과 조선인민의 자립적 근대주체화는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착종되는 가운데 체제협력적 조선인이 지배체제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일본제국의 실현을 통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 한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의 현실화 속에서 조선인 지배층의 조선통치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려 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청원이란 운동방식에서 보이듯 그들 자신이 수동적 존재였다. 일제가 이들의 논리에 합당한 지배정책을 내놓지 않을 때, 독자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때문에 일제의 정책변화에 따라 부침이 심하였고, 운동 역시 실패하였다.하지만 이들이 주장했던 대제국국민화의 환상과 식민지배를 그 과정으로 보는 논리는 1930년대 이후 전향한 민족운동세력의 ‘내선일체론’에 이어졌다. 1937년 이후 전향자들이 주장한 ‘동아협동체’, ‘동아연맹’ 등은 ‘조선민족의 자립’은 불가능 하며, 일본이 주도하는 대연방국가의 일원이 되는 것만이 세계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일진회까지 소급되는 친일정치운동세력의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민족에 대한 인식의 연속선상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일진회 이래 친일정치운동세력이 조선인, 조선민족의 자립적 주체화를 의문시하고, 경쟁이 치열한 근대세계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존립을 제국국민으로의 편입으로 치환시킨 것과 기본발상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제의 강점을 대국가국민으로의 재탄생이라고 생각했던 친일정치운동세력과 마찬가지로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대륙침략과 민족운동의 쇠퇴 속에 조선사회의 자립성을 회의하게 된 지식인들은 ‘민족의 국가적 자립’을 포기하고 일본제국으로의 편입하는 것을 조선인의 탈출구로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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