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정책과 미국의 견제정책에 관한 연구 : 중일전쟁(1937-41)과 태평양전쟁의 연계성을 중심으로
저자
발행사항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3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 정치외교학과 2013. 2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ii, 280 p.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강성학
참고문헌: p. 266-280
DOI식별코드
소장기관
1941년 12월에 일본의 패권정책과 미국의 견제정책 간의 충돌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충돌로 인하여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으며, 그 전쟁으로 인하여 오늘날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상당부분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제기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그 충돌이 언제, 그리고 왜 불가피해졌느냐는 것이다. 동아시아 패권은 러일전쟁 이후로 일본의 지속적인 정책목표였고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은 일본의 패권정책을 용인할 수 없다고 공표했지만 양국은 그 충돌 직전까지도 전쟁만은 피하려고 애썼다. 그렇다면 두 강대국 간의 충돌이 불가피해진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리고 그 충돌은 왜 불가피해졌을까?
이 논문에서는 투키디데스와 클라우제비츠 등 고전적 현실주의자들의 전쟁이론을 바탕으로 일련의 분석틀을 제시하고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즉, 국제체제와 국가적 성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쟁이 불가피해지는 조건을 설명할 수 있으며, 전쟁이 불가피해진 국제위기 속에서 정치지도자들의 판단과 결정에 대한 해석학적 분석을 통해 전쟁의 발발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양국의 정책이 충돌하는 과정을 네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함으로써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평화의 시기로 간주되는 1920년대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체제는 다극체제로서 책임전가의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조건에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지위를 추구했다. 그러나 일본 지도자들은 강대국들의 개입을 우려하여 행동을 주저했다. 반면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주도하고 있었던 미국은 중국을 시장으로 삼고, 자유무역을 보장한다는 문호개방정책을 추구했고, 1920년대에 워싱턴체제를 구축하면서 목표를 성취했다. 따라서 1920년대의 평화는 능력을 가진 쪽은 현상유지를 추구하고, 현상타파를 추구하는 쪽은 능력이 부족함으로써 형성된 ‘복합적 균형’상태였다. 1930년대 초에 대공황의 여파로 그 균형이 무너지자 일본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중국 역시 일본이 패권을 추구할 경우 강대국들의 공동으로 개입할 것을 예상했고, 그래서 일본의 위협에 대해 책임전가정책으로 일관했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생명을 걸 생각이 없었다. 미국은 책임전가정책을 고수하다가 그것이 실패하면 묵인하는 패턴을 반복했다. 침략의 당사자와 그 지역의 주도적 국가가 책임전가와 묵인을 반복하는 동안 일본은 팽창을 지속했다.
만주국 수립 직후인 두 번째 시기에도 일본은 팽창을 지속했다. 시안사건이라는 우연적 사건으로 마침내 하나로 통합된 중국은 기존의 양보정책을 재고했고, 1937년 7월에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방어를 선택함에 따라 중일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중일전쟁의 전장이 전 중국대륙으로 확대되고, 공격의 정점에 도달한 이후에 전선의 소모적 교착상태가 지속되었던 기간이다. 일본과 미국에게 이러한 결과는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교착상태 속에서 일본의 자원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그 결과 안보위기가 초래되었다. 소련 및 미국과의 총력전을 대비하여 비축해 두었던 자원들이 고갈되면서 총력전 수행이 불가능해졌고, 자원의 고갈로 미국에 대한 자원 의존성이 심화되었다.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일본에는 그러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다. 한편 중일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대외정책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패권정책을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그러한 위협인식을 자국민들에게 교육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중국의 저항을 국민들에 대한 ‘교육’ 기회로 삼았다. 중일전쟁 발발 후 ‘격리연설’을 통해 일본과 독일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후로 그는 국민들에게 영국이나 중국의 문제가 경제가 아니라 안보의 문제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중일전쟁을 통해서 미국인들은 점차 일본을 독일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루스벨트는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일본에 대해 경제제재를 가하는 방식으로 일본에 대한 견제정책을 시작했다.
마지막 시기는 일본이 인도차이나 북부로 진격하여 미국과 동남아시아를 갈등의 몫으로 하여 대립하고, 일본의 삼국동맹 체결로 지구적 수준과 지역적 수준에서 국제체제가 양극화 되어 초래된 위기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단계이다. 1940년 여름에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지도자들은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거나 점령당할 위험에 처한 국가들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들을 점령함으로써 자신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 동남아시아는 미국의 안보에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미국은 당시 산업생산과 무기생산에 필수불가결했던 몇 가지 전략자원들을 그 지역에 의존했고,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의 생존이 그 지역의 유지에 달려있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진격을 위해 삼국동맹을 체결했고, 그 결과 지구적으로는 추축국과 연합국이,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미국이 양극화되었다. 중일전쟁으로 초래된 안보 불안 속에서 양쪽은 안보딜레마에 빠졌고, 두 국가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 미국인들은 일본의 중국 지배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경제제재로 대응했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미국의 선택지는 좁아졌다.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것도, 소련을 공격하는 것도 영국의 생존에는 바람직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일본의 중국지배를 용인할 생각도 없었다. 소련의 위협이 줄었다고 생각한 일본은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격했다. 이에 대해 미국이 사실상의 석유수출금지조치로 대응하면서 양국간 위기가 초래되었다. 미국은 일본측에 중국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미 미국과의 갈등을 자존(自尊)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던 일본은 그러한 치욕스러운 양보보다는 차라리 위험하지만 명예로운 전쟁을 택했다. 일본은 선제기습 공격을 통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장기 방어전을 수행하겠다는 계산으로 진주만을 공격했다. 일본인들은 그 공격으로 미국인들이 사기를 잃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미국인들은 그 피습을 ‘치욕’으로 간주했고, 즉각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인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자존의 문제로 해석했고 일본인들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결과를 종합해 보면,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부터 미일간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그리고 여러 원인들 가운데 그 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던 것은 ‘동아시아 패권’이라는 일본인들의 정치적 목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쟁은 일본에 의한 패권전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사무라이들은 국제정치적 제약 속에서도 그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다극적 국체제제는 그 목표 달성을 위한 기회였고, 양극적 국제체제의 제약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국제정치학자들은 여전히 중일전쟁을 결정했던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결정했던 일본을 상반된 이미지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노골적으로 패권을 추구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미국의 석유금수조치에 의해 초래된 안보위기 속에서 안보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공격적현실주의자들은 전자를, 방어적현실주의자들은 후자를 1930년대 일본의 ‘정상적인’ 모습으로 간주한 후 ‘비정상적인’ 시기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두 시기가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라면, 어느 한 시기를 ‘정상적인’ 시기로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 논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이 시종일관 집착했던 것은 동아시아에 위계적 국제질서를 수립하고 그곳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중일전쟁은 그러한 지위에 오르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태평양전쟁은 그러한 지위를 지키고 인정받기 위한 과정이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국민들이 여전히 그 충돌의 책임에 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결론은 현실적으로도 중요하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연계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그러한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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