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경상우도 사족의 分化와 動向
조선후기 경상우도 사족은 남명학파라는 학문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정파(政派)상 북인의 입장을 표방하였다. 이들은 학문의 실천을 강조했던 남명의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의병이 되어 왜적을 물리쳤다.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피폐해진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복구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공로로 이들은 북인으로서 광해군 즉위와 함께 집권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은 대거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스승에 대한 존숭작업을 진행하여 1609년(광해군 원년) 남명을 제향하는 덕천·신산·용암서원이 동시에 사액을 받게 된다. 광해군 집권기 우도 남명학파는 이들 서원을 출입하며 학파·정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여론을 주도해갔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실각하면서 학파·정파의 불가분 관계로 인해 우도 남명학파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그 선택지는 정온을 중심으로 한 중북계 인사들을 통해 남명학파가 재결집하거나, 집권세력인 남·서인으로 편승하는 방법이었다. 집권세력으로의 편승은 곧 퇴계학과 기호학의 수용으로 이어졌다.
중북계로의 결집은 반정 직후 가장 원로 격인 동계 정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반정 이후 용암서원의 원장을 지내는 한편, 덕천·신산서원에서 하항·김우옹을 추향하려 할 때 자문해주기도 했다. 그의 문인들은 대체로 정인홍과 관련있거나 중북계에 해당하는 인물이 많았다. 무민당 박인 역시 생전에는 대북에 반대한 전력으로 남명학파 내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반정 이후부터 용암서원의 원규를 새로 작성하고 남명문인록인 『산해사우연원록』을 편찬하는 등 남명학파 내 위상도 높아져갔다. 이에 박인은 합천 사족의 결속력 강화를 위해 수구계를 결성하고, 용연재를 건립하여 문인을 양성했다.
퇴계학으로의 전도는 퇴계·남명 양 문하에서 수학한 정구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정구는 남명학파의 일원이기도 했지만, 광해군 집권기 정인홍과 대립하며 이미 남인의 종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구 이후에는 진주·단성·함양·함안 일대 남명학파의 가문에서 장현광의 문인이 되기도 했다. 이 무렵 상주 일대에서는 정경세를 중심으로 학단이 형성되고 있었다. 우도에서는 합천의 강대수와 고령의 박응형이 문인으로 확인되었다.
17세기 후반 남인계는 이현일을 중심으로 한 갈암학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현일은 유배에서 풀려나 1년간 진주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40여 명의 우도 문인들을 규합하였다. 이 중 절반은 선대부터 정구·장현광의 문인으로서 퇴계학을 계승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새롭게 문인이 된 경우였다. 여기에는 남명 후손과 남명학파 핵심인물의 후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8세기 우도 내 퇴계학통은 더욱 확대되어 이상정·정종로의 문인도 다수 배출되었다. 이상정 문인은 단성·밀양을 포함하여 13개 지역에서 확인되며 이들은 스승에게 선조에 대한 현양 문자를 청하기도 했다. 이상정이 찬술해준 문자를 보면, 퇴계학파적 시각에서 내용이 기술되고 있었다. 반면 정종로의 문인은 진주·함안을 포함하여 8개 지역에서 확인된다. 정종로는 이상정과 달리 남명학파에 대해 비교적 개방적 시각에서 기술해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 퇴계학통의 확대에는 근기남인 이만부의 역할도 컸다. 바로 1721년·1724년 그가 덕천서원의 원장을 역임하면서 우도의 침체된 학풍을 다시 일으켰던 것이다. 이때 이만부와 교유한 인물은 서원이 소재한 진주권 유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편 우도의 서인화는 삼가의 팔계정씨 정지린·함양의 남원양씨 양홍주가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남명학파 내에서도 비중 있는 인물로, 정지린은 남명의 생질이자 남명의 첫 제자이기도 했다. 또 양홍주는 정인홍의 처남이었다. 우도의 서인화가 남명·정인홍과 인척관계인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이이의 학통은 김장생-송시열·송준길-권상하로 이어져 이들에게 사사한 우도 문인 수는 약 47명이었다. 이중 가장 비중이 높은 지역은 삼가로, 팔계정씨·안동권씨·은진송씨 가문에서 27명이 확인된다. 문인록에는 확인되지 않지만, 1637년 송준길의 우거를 계기로 안음 일대 서인화도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특히 삼가의 문인들은 송시열 변무소·사계 승무소·양송문묘종사와 관련된 정치적 현안에 있어 우도 서인계를 대표하며 상소를 주도해 나갔다.
18세기 우도의 기호학통은 호론계 윤봉구·송환기 문인과 낙론계 이재-김원행·송명흠 문인이 배출되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윤봉구·송환기 문인은 약 46명, 낙론계 문인은 약 29명 확인되었다. 17세기는 삼가를 중심으로 문인이 형성되었다면, 이제는 거창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가문의 인물들이 확인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경상우도 사족들의 학파적 분화와 함께 그들의 자치기구인 서원 역시 정파적으로 변화해갔다. 북인계 서원으로 분류되는 합천 용연서원은 인조반정 이후 박인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성주·거창 일대에서 박인이 정인홍 문인이었다는 것과 회퇴변척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서원의 건립과 사액 여론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서원 측에서는 두 혐의에 대한 변무를 끊임없이 해야만 했다. 이후 용연서원은 남인계 성향을 보이면서 남명학파권 서원과의 교유도 지속하였다.
진주 덕천서원과 함양 남계서원은 우도 남명학파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정인홍 문인들의 참여도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서원은 반정 이후 정치적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덕천서원은 하홍도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정인홍이 관여했던 『남명집』을 훼판하면서 대북과의 연결을 차단시켰다. 이후 이만부·채제공·정종로 등 남인계 인사들이 원장을 지내며 서원은 친남인화 되어갔다. 남계서원은 1685년까지 『경임안』에 원장이 없어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이 서원은 노론화한 정여창의 후손들이 서원 운영을 주도하면서 서원 역시 노론화하였다.
이처럼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막힌 상황에서 우도의 사족과 서원은 학파·정파를 달리하며 집권세력에 편승해갔다. 그 과정에서 남·서간의 갈등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공조의 모습도 나타났다. 밀양에서는 사림파의 종장인 선산김씨 김종직의 후손과 여흥민씨 민구령 후손들이 혼반에 있어 정인홍을 비롯한 남명학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북에 반대했던 남인계 인사들이 반정 이후 향론을 주도하면서 이들은 노론계로 전향하였다.
반정 이후 남인계가 밀양 향론을 주도하다보니, 17세기 후반 노론계 부사의 부임은 자연스레 갈등으로 이어졌다. 밀양의 신흥 노론세력들은 수령과 짜고 남인계 인사들을 모함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창녕조씨 조광익의 후손들은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힘을 빌려 위기를 해결하였다.
한편 19세기 초반 밀양 출신 송계 신계성 가문에서는 후손 신호인을 중심으로 『송계실기』 편찬에 들어갔다. 신호인은 기호학통을 계승한 송환기의 문인이었는데, 이 가문은 삼가의 팔계정씨 가문과의 혼반을 계기로 밀양에서 삼가로 이거해왔다. 한편 밀양에 남아 있는 신계성 후손들은 남명학파적 면모를 보이다가 한강 정구를 매개로 남인화했다.
실기 편찬을 주도했던 신호인은 밀양 종중으로부터 신계성과 관련된 자료를 받는 등 서로 협력의 모습을 보였다. 반면 실기의 발문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실기에 남·노 인사의 발문이 함께 실렸다는 점에서 신호인의 남·노에 대한 개방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19세기 당론에 따른 갈등 보다는 신분제 해체와 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향촌 내 사족들의 결속이 우선시 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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