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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의 국호 개칭과 정치적 지향 = Renaming of the State of King Seong in Baekjae and His Political I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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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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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466(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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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백제 성왕이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칭한 사건을 통해,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 지향을 살펴본 것이다. 논의는 크게 세 단계로 진행하였다. 먼저 국호 개칭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백제의 역대 국호의 연원을 분석하고, ‘南扶餘’에 담긴 부여 계승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국호를 통해 지향했던 성왕의 정치적 목적을 시조묘 제사와 지방통치제도의 개편을 중심으로 추론하였다.
웅진천도 이후 혼란한 상황을 극복한 동성왕은 점차 남방으로 그 관심을 넓혀 나갔다. 동성왕은 재위 20년(490) 무진주에 진출하여 남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뒤이은 무령왕은 512년에 이른바 ‘任那 四縣’을, 513년에는 己汶을 영역화하여 섬진강 수계로 진출하였으며, 성왕은 무령왕의 사업을 계승하여 529년 帶沙(多沙津)를 병합하고 섬진강 수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성왕은 섬진강 수계를 장악한 뒤, 영산강 유역에 대한 병합작업에 돌입하였다. 성왕은 영산강 유역에 대하여, 주변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서서히 장악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무령왕 대 유리하게 전개되던 대 고구려전 양상이 악화되어 영산강유역에서 군사 활동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성왕은 신흥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복암리 고분군 축조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반남 고분군 세력을 압박하였고, 마침내 사비 천도에 즈음하여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에 대한 병합작업을 완료하였다. 즉 성왕이 국호를 개칭하였던 요인에는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을 병합함으로써 국가의 전반적인 상황이 크게 변화한 배경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 개칭된 남부여라는 국호에는 백제의 새로운 지향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백제의 역대 국호가 개칭된 배경에는 정치 단계의 발전과 영토의 확장이라는 요인이 있었다. 백제 건국 이후에는 十濟, 伯濟, 百濟, 尉禮國, 鷹準, 羅鬪, 南扶餘의 국호를 사용했는데, 특히 十濟-伯濟-百濟-南扶餘의 변천과정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十濟-伯濟-百濟의 국호에는 마한과의 연관성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왕은 마한과의 연관성을 해소하고, 왕실의 출자 인식인 ‘扶餘’를 드러내고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가 ‘南扶餘’의 국호를 사용한 데에는 ‘북쪽의 부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백제가 상정한 ‘북쪽의 부여’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 기록된 북부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이는 사서의 찬자들이 상정한 북부여가 고구려의 시각에서 호명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백제가 상정한 ‘북쪽의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를 포함하여 북방계통 국가들의 원류로서, 기원전 2~3세기경에 존속했던 ‘原扶餘’를 의미한다. 즉 성왕이 개칭한 남부여에는 왕실의 부여 계승 의식을 드러냄과 동시에 原扶餘를 재건하고자 한 의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성왕은 原扶餘 계승에 대한 실현으로써 새롭게 仇台廟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분주에 구태와 함께 優台가 기록되고 있는 점과, 우태가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전에서 왕 아래의 고위 관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볼 때, 구태가 특정 인명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온조가 비류집단을 아우르고 국호를 백제로 개칭한 것과 마한을 병합한 행적은...
This paper examined the political intention of King Seong in Baekjae through the case that he renaming of the state from Baekjae to Nambuyeo. The discussion largely was proceeded in three stages. First, I looked at the background that the name of country was changed. Secondly, I analyzed the historical origin of the country’s name and grasped meaning about succession of Buyeo contained to Nambuyeo(南扶餘). Finally, I inferred political purpose which King Seong sought through the retitle of country focused on rituals to progenitor tomb and reorganization of the local government system.
King Dongseong, who overcame the chaotic situation after transferring the capitla to Woonggin, gradually his interest to the south. King Dongseong entered Mujinju and exercised his influence on the southern region. King Muryeong, moreover, territorialized Imna 4 Hyeon(任那 四縣) in 512 and Gimun(己汶) in 513.
After King Seong had utterly seized Seomjin River by merging 帶沙(多沙津) in 529, He started to annex Yeongsan River. He gradually did through cooperation with peripheral powers. Because it was because that the war with Goguryeo proceeded advantageously became got worse and was difficult to keep pace with military action in Yeongsan River. King Seong oppressed powers in Ban-nam Tomb Complex through cooperation with constructive powers in Bogamri Tomb Complex and completed merge to Mahan’s powers in Yeongsan River, when changing country to Sabi. In other words, it might be considered that changing the name of country in the reign of King Seong be related to background that overall situation in country largely changed by merging Mahan’s powers in Yeongsan River.
The new intention of Baekjae was implied in The name of country, Nambuyeo, retitled in this situation. The background the name of country in Baekjae was renamed was related to development of political level and territorial expansion. Since the foundation of the country, Baekjae had used the name of country such as Sipje(十濟), Baekjae(伯濟), Baekjae(百濟), Wiryeguk(尉禮國), eungjun(鷹準), latu(羅鬪), Nambuyeo(南扶餘). In particular, the process changed from Sipje(十濟) to Baekjae(伯濟), Baekjae(百濟), Nambuyeo(南扶餘) was conducted in the process that Baekjae was annexing Mahan. So, It was considered that King Seong changed the name of country to Nambuyeo so as to abandon the association with Mahan and emerge ‘Buyeo(扶餘)’, cognition about origin of royal family in Baekjae.
The use of the title, Nambuyeo in Baekjae was thought to keep ‘the northern Buyeo’ in mind. But ‘the northern Buyeo’ which Baekjae postulated wasn‘t Bukbuyeo recorded in historical materials such as Samguksagi. It was because that Bukbuyeo mentioned in these materials was an object to be called through perspective of Goguryeo. ‘the northern Buyeo’ that Baekjae postulated meaned ‘Wonbuyeo(原扶餘)’ existing in B.C. 2~3 as source of north system nations including Gogurye, Baekjae.
King Seong newly performed ancestral rites, Gu-tae shrine, as realization about succession of Wonbuyeo. there were many opinions about substance of Gu-tae. It was considered that Gu-tae didn’t refer to specific name, given Woo-tae was recorded with Gu-tae in footnote, Baekjaebongi, Samguksagi and mentioned to high ranking under king in Dongijeon, Samkukji and Whohanseo. However, what Gu-Tae was set person who founded Baekjae was calling On-jo(溫祚), founder of Baekjae. Also what On-jo had put together Bi-ryu’s group, changed the name of country to Baekjae and merged with Mahan was similar to that King Seong annexed the last Mahan’s powers and retitled to Nambuyeo. It was thought that King Seong perform ancestral rites, Gu-tae shrine for worshiping On-jo, founder of Baekjae, by setting Gu-tae, as well.
At that same time, King Seong reorganized Damro system to Bang・Gun・Seong system. The five direction system would be enforced for ruling over territory ...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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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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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1.18 | 1.18 | 1.0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96 | 0.97 | 2.484 | 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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