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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의 조형 : 한국 나한상의 제작 추이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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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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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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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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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羅漢)은 깨달음의 경지인 아라한과(阿羅漢課)를 증득한 불제자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중국에서 당말(唐末) 오대(五代)부터 신앙의 성행과 더불어 시각화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활발히 제작되었다. 나한은 십육나한(十六羅漢), 십팔나한(十八羅漢) 그리고 오백나한(五百羅漢)으로 무리를 이루며 신앙화 되어 왔는데, 한국은 이 중 특히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을 선호했다. 고려와 조선전기는 국가와 왕실의 불사가 주도적이어서 규모가 큰 오백나한상의 제작이 좀 더 활발했으며 조선후기는 주도권이 사찰과 민간에게로 이행하면서 십육나한상의 제작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활발했다. 나한상은 주로 나한전 내에 석가삼존과 호법신중과 함께 배치되었으며 조각상만 배치된 곳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불단에는 조각상을 모시고 그 뒤인 후불벽에는 나한도를 봉안했다. 나한은 타 주제의 존상과 달리 도상(圖像)이 규정되어 있지 않아 장인들이 도상을 창안하기도 하고 선행 작품 혹은 타국의 도상을 탐색, 작품에 수용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고려는 중국, 특히 송(宋)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 도상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면서 작품에 활용했고 조선은 초기에는 고려의 도상을 계승하다가 이후에는 전통도상, 중국 명(明) -청대(淸代)의 도상 그리고 장인들이 도상을 창안하기도 하면서 다양성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한국 나한상은 왕실의 화원(畵員)이나 개인 공방의 장인, 그리고 사찰의 승려 등 다양한 집단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특히 조선후기에는 승장(僧匠)들이 전담하면서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한국의 나한상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봉안(奉安)과 배치이다. 한국은 중국이 나한전 외에도 대웅전이나 관음전, 문수전 등 다양한 전각에 나한상을 봉안하는 것과 달리, ‘나한전’에 봉안하는 것을 고수했다. 물론 한국에서도 화상 중 일부는 주불전 에서도 확인되지만 이 경우는 주로 불전의 위쪽인 상벽에 그려져 있어 예배용이 아닌 장엄용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두 번째는 도상의 공유이다. 한국의 나한상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동시기 타 작품들과 도상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데, 이는 공간적 근접성 그리고 장인들의 긴밀한 교류와 개방적인 태도 등이 주요하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세 번째는 세속화(世俗化)된 이미지의 부각이다. 나한은 본질적으로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데 한국의 나한상은 그 중 인간적 면모가 좀 더 적극 표출되어 있다. 이는 나한이 본래 불교 수행자들이었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인 동시에 중생들이 나한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표현하고자 했던 의지의 표출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국의 나한상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존하는 수량이 적은 편이지만 한국만의 특성을 확보하고 있어 동아시아적 범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보기Arhats are the Buddha's disciples who obtained the state of enlightenment, the Arhat hierarchy. People started to visualize how they were with development of faith from the late period of Dang 唐 and the Five Dynasties 五代 China. And those statues were prevalently made also in Goryeo 高麗 and Joseon 朝鮮 in Korea. Arhats have been worshipped with the composition of the sixteen Arhats, the eighteen Arhats, and the five hundred Arhats. Among them, Koreans especially preferred the sixteen Arhats and the five hundred Arhats more. In Goryeo and the early period of Joseon, the nation and the kingdom actively led Buddhist services, so it was prevalent to make the big scale of the five hundred Arhats. On the other hand,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its leadership was moved to temples and citizens, so making the sixteen Arhats sculptures and paintings were relatively vigorous. Unlike other sorts of Buddhist deities, the Arhats did not have any regulated iconography, so master artisans created how to make the iconography and explored the previous works or the examples in other nations, and developed it by accepting those cases. Goryeo Dynasty selectively adopted the iconographies of Arhat images and used it for making the statue through the brisk interchange with Song 宋 China. And Joseon Dynasty kept the iconography of the Goryeo's images in the early period, but after then, it came to diversity as using the traditional iconographies and the iconographies from the periods of Ming 明 and Ching 淸 China, and creating ones by master artisans. The Arhat sculptures and paintings of Korea were made by various groups, the kingdom's art center Hwawon 畵員 or master artisans of private studios and monks of monasteries. Especially monk artisans mainly took the work of making those sculptures and paintings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Korea as fully showing their abilities. The Arhat images of Korea have distinctive identities from China and Japan in the three aspects. First, it was the enshrinement 奉安 and its arrangement. Unlike China which enshrined the Arhat statues in various Buddhist halls, such as the Dae'ungjeon hall, the Gwan'eumjeon hall, the Munsujeon hall including the Arhat hall, Korea adhered only to enshrine them in 'the Arhat hall'. Of course, some Arhat paintings were found in the main Buddha hall also in Korea, in this case, they were usually drawn onto the upper part of the Buddha hall for the use of decoration, not of ritual, as a discrepancy. Secondly, it was the sharing of the iconography. The iconograpies of Arhats in Korea are greatly similar to other works in the same period if comparing to China and Japan. It seems to be the result that spatial accessibility, the intimate interchange between master artisans and their opened attitudes played major roles. Thirdly, it was to stress the secularized image. Arhats intrinsically have both of holiness 聖 and secularity 俗, the Arhat images of Korea more actively shows humane aspect. It was the result of strong recognition that Arhats were originally Buddhist practitioners with human aspect, at the same time, it was assumed as the expression of people who wanted to get close to Arhats. The Arhat Sculptures and paintings of Korea were relatively fewer than China and Japan, but they had very distinctive identities that only Korea could have.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y have very significant meanings in the district of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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